[2026 아티스트 시리즈 1] 사랑은 우리 머리 위를 동동- 떠다니는 것이다
- 등록일2026.03.22
- 작성자장유진
- 조회33

오후 2시에는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사랑을 떨어트렸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말을 꺼내기 전, 가장 간편한 도피처는 내가 이어갈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단어의 본래 뜻을 살펴보는 일이다.
나는 가로로 긴 동그라미 안에 사랑을 적고 아래로 스크롤한다. 사전도 사랑을 말하고, 블로그도 사랑을 이야기한다. 논문에서도, 동영상에서도, 누군가의 인터뷰와 음악 안에서도 사랑은 늘 말을 하고 있다.
사랑이 우리 머리 위를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그 애매한 것이 늘 너와 내 곁에 있다.
2026년 더하우스콘서트 상주음악가로 선정된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영은 첫 번째 무대 ‘Portrait’의 프로그램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 어린 시절 어두웠던 정서에서 지금의 안정된 정서까지를 곡으로 연결해봤습니다. 솔로에서 3인의 트리오로, 다시 솔로, 4인의 콰르텟과 솔로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에서도 제 개인의 음악 여정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러브송을 통해 결국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모든 영역의 사랑) 작은 신념도 담아보았습니다."
블로흐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바알 셈」 모음곡 중 〈니군〉 — 김재영(Violin), 임현진(Piano)
사랑으로 다다르는 길 초입에 내려앉는 건반의 타격과 그 짙음, 그에 상응하는 바이올린의 결이 무척 또렷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매몰찬 것은 아닌데, 말릴 수 없는 처연성이 현 위에 가득해서 곡이 흐를수록 당혹스러울 만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김재영과 임현진은 자신보다도 두 손 안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들었다. 오직 소리로.
라흐마니노프 — 비가풍 3중주 1번 사단조 — 김재영(Violin), 박유신(Cello), 임현진(Piano)
이날은 무대 오른편, 그러니까 첼리스트가 잘 보이는 자리에서 공연을 봤는데, 덕분에 첼로의 성마른 첫 움직임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다.
박유신 첼리스트가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듯한 담담한 표정으로 곡을 온몸에 그어 내기 시작하면, 하얀 조명 아래 그 눈빛과 첼로가 겹쳐지는 순간 청자는 곡에 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마주한 연주는 예상 이상으로 마음 안에 박히는 조각들로 가득했다. 음악 안에서 심장이 이렇게까지 박동할 수 있을까.
그저 라일락 향취를 맡고자 했을 뿐인데, 투명한 디퓨저 하나가 그 삼각형 안으로 통째로 쏟아져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아직 만날 수 없는, 어쩌면 끝내 만나지 못할지도 모를 농밀한 에너지가 그곳에 모여들었고, 그 바람 안에서 누구 하나 흥분한 기색 없이 시선을 내려놓고 있었다.
비탈리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샤콘느 사단조 — 김재영(Violin), 임현진(Piano)
피아노와 함께 걷다 마주친 바이올린 소리가 그야말로 ‘끼약’이었다. 끼약. ‘저 사랑 뭐지?’와 ‘저 사람 뭐지?’를 동시에 떠올리게 만드는 소리였다.
블로흐와 라흐마니노프를 지나 비탈리의 샤콘느를 만나기까지 깊게 쌓여 온 감정선 덕분일까. 통제 선상 안에서 절제됨을 잃지 않고 뜨거움을 노래하는 광경을, 얼음처럼 그려내는 연주 탓일까. 한 손에서 펼쳐지는 세련된 두 선의 소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진동한 탓이겠지.
악보도 보지 않고, 눈을 꼭 감은 채 독백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잊힌 채 지나온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저마다의 서사가 현 위에 하나씩 놓이는데, 어떻게 저 현에서 시선을 뗄 수 있을까. 뜨거운 어깨를 달래주는 다정한 건반을 놓칠 수 있을까.
공연 전, 더하우스콘서트의 ‘소심음감’에서 김재영 바이올리니스트가 ‘관객이 어떤 것을 들어주면 좋을지’에 관한 질문에 이런 말을 했다.
“연주자의 에너지가 관객분들에게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 말이 어떤 뜻인지, 그날의 연주를 통해 직접 건네받을 수 있어 기뻤다.
멘델스존 — 현악 사중주 제1번 내림마장조 Op.12 — 김재영, 임동민(Violin), 박하문(Viola), 박성현(Cello)
Adagio non troppo - Allegro non tardante
1악장은 비탈리의 열기가 한 겹 가라앉은 뒤에 찾아온, 더 넓고 더 어두운 공기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 곡을 처음 들었던 게 이든 콰르텟의 연주에서였고, 이번 무대가 두 번째였으니 그 자체로 의미가 깊었다. 음원을 듣는 것 말고, 공연을 통해 같은 곡을 다른 연주자 조합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굉장한 색다름이었다.
더군다나 이 곡의 1악장 도입부에는 연하늘색 온기가 은은히 번져 있었다. 방금 전 비탈리의 뜨거움이 잠시 저물어든 사이의 이야기라고 떠올려보면 어떨까.
무턱대고 황홀하다고 말하기에는 까만 고요함 쪽에 더 가까운 소리가 펼쳐졌다고 해야 할까. 쉽사리 표현하기 어려웠다. 내리꽂는 밀집감보다는 풍경이 되는 시간. 지금 앉은 자리에서 팔을 마구 내뻗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움이 있다. 49:26 무렵 들려온 첼로의 선율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네 대의 현악기 모두 하나같이 영롱하다.
Canzonetta: Allegretto
그 영롱함이 공명하는 방울이 되고, 짧은 검은색 실크 리본이 되었으니. 남자 연주자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성마름과 각 맞춤 속에서도 소리는 제대로 광택을 내고 있다.
굉장히 풍부한데 안아주는 맛은 없고, 윤기가 나도록 반듯하게 닦아낸 표면 같은 매력이 있다. 약간 새 차를 뽑고 한껏 신이 난 멋진 사촌들을 보는 기분이랄까.
Andante espressivo
이날 공연 중에서 가장 기대했던 악장이었는데, 그 시간을 선명하게 건네받을 수 있어 행복했다. 제1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정적이 얼마나 길고 또 깊을까, 그 생각만 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멀어짐마저 아쉽지 않았다.
Molto allegro e vivace
힘! 강력함! 몰아침! 이 우선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두 숨 정도는 내려놓고 깨끗하게 정면돌파하는 방향감이 분명해서 어디 가- 하고 붙잡기는커녕, 은은하게 드리워진 서정성에 마음 편히 공중의 음표를 탐미할 수 있었다.
1:01:30, 이를테면 이런 부분.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내딛어버리는지.
오늘의 멘델스존은 블랙 멘델스존이 분명하다. 까만 밤 안에서 이토록 울창해질 수 있다니! 제 갈 길을 이렇게 잘 맞춰 낼 수 있다니.
새카만 무지개와도 같은 것이 그늘진 공간의 어둠과, 휘영청한 달 주변의 빛 테두리가 되어 사방을 번쩍거린다. 1:05:25, 혼자 남았을 적에도, 그 공을 넘겨받았을 때에도 두꺼운 선은 이어진다. 얇아졌다 해도 그 든든함이 가득하니 박수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수크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사랑의 노래〉 Op.7, No.1 (arr. by J. Kocián) — 김재영(Violin), 임현진(Piano)
다정한데 온순하지 않고, 소리는 성격 있고 다채로운데 그 안은 부드럽다. 이 나긋한 개운함은 뭘까. 수분크림은 아닌데… 아, 워터 에센스려나. 은은한 향기가 가만히 코끝을 맴돈다.
앙코르
쇼팽 — 녹턴 제20번 올림다단조 — 김재영(Violin), 임현진(Piano)
클래식을 사랑하지만, 이상하게 앙코르 곡을 들을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어디서 들어봤는데. 제목이…” 곡이 흐르는 동안 친구와 나는 소리 없는 퀴즈쇼를 나누고 있었다. 짙은 사랑의 결이 이어지는 그 와중에도.
김재영 바이올리니스트가 바이올린을 잘 다루는 연주가임은 매우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그 사실이 유달리 도드라지는 순간이 오면 나도 모르게 숨죽이게 된다. 유려한 끝으로 이어지는 이 길목에서도.
누군가를 향해 곧장 달려가는 감정보다, 소리의 끝에 오래 남아 머물러주는 기척에 가까웠으니. 아참, 내가 말했던가? 그의 사랑이, 우리 머리 위를 동동- 떠다니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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