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x무브먼트_review] 어—마 어마한 사랑으로 전하는!
- 등록일2025.10.29
- 작성자장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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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완성된 결과물일 때만 성립하는가?”
그러게. 나는 이 공연이 꽤 완성된 결과물이라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을지도 모르겠다. 완성이라는 말 자체가 ‘모두 이뤘다’는 뜻이지만, 우리가 언제 그런 순간을 온전히 경험했던가. 우리는 매일같이 이 무형의 것을 추구하고, 반복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들이 아닌가. 결국 우리의 여정은 ‘이뤄내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 그 시간에 머물러 있음 자체가, 어쩌면 ‘완성’일지도 모른다.예술은 결국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며 성립하는 개념일까. 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여정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겠구나.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예술을 사랑하는 바보들이니까. 이 모랫바닥 위에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1. 뒤엉킴
솔직히 말해볼까? 예매 직전까지 나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 무대를 선택하기까지 여러 가지 복합적인 고민이 뒤엉켜 있었다. 봐야 할까, 말아야 할까. 결국 관람 결정의 선상 위에 ‘봐보자’라는 긍정문이 뜬 건, 조약돌만 한 믿음 때문이었다. 더하우스콘서트가 이 프로젝트를 택한 데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래, 믿어보자. 언제 이곳에서 실망한 적이 있던가.
공연에, 또 클래식에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나는 왜 뒷걸음치려 했을까? 바로 라벨, 그리고 피아노의 조합 때문이었다. 내가 이 공연을 택한 건 순전히 그동안의 신뢰와 그 안의 사람들, 색다른 공간, 그리고 ‘무브먼트’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라벨은 내 세계 안에서 유독 낯선 작곡가였다. 그를 떠올리면 아주 유명한 ‘물의 유희’가 있지 않은가. 이게 무슨 곡이냐고? 당신은 드뷔시의 ‘달빛’을 아는가. 듣자마자 “아, 저 영롱한 하얀 달빛!”이 떠오르는 그 곡처럼, 라벨의 ‘물의 유희’는 듣자마자 “아, 저 반짝이는 물방울!”을 떠올리게 한다.
현대음악처럼 어렵게 첫인사할 필요 없이 “아, 이 자연의 아름다움, 그 자체의 눈부심!”을 쉽게 전달받을 수 있다. 그래서 재미없다. 이를테면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이 있지 않은가. 올해만 해도 두 번이나 실연으로 들었는데, 누구의 연주든 이상하게 마음 안에 쿵 하고 와닿지 않았다.
사실 곡 자체도 감정적 피로도를 일으킬 만큼의 일렁임을 유도하지 않는다. 그냥 사람마다 있는 ‘끌림’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는 라벨에게서, 특히 피아노 곡에서는 그 느낌을 잘 받지 못했다. 왜일까. 반할 만한 포인트가 이렇게나 많은데 왜 이끌리지 못하는가.
간단하다. 발굴하는 재미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눈이 부셔 끼어들 틈이 하나도 없다. 첫인상이라도 거칠고 야수처럼 수염을 크앙! 기르고 계시면 어떻게든 눈인사라도 할 텐데, 여긴 이미 물광·속광·속건조 까지 다 잡은 빛의 광택감이 사방에 가득하다. ‘내 미모를 음미해봐.’ 하고 부드럽게 자태를 드러내시니, 나도 모르게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다정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현대음악에선 예쁜 소리를 만나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고, 숨어 있는 것을 파헤쳐야 했으며, 두 눈으로 길게 응시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선 연두빛 파스텔 카펫으로 길게 마중 나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친절함이 내 흥미 곡선을 완만하게 만들었다. 음, 좋긴 한데, 내가 이걸 보러 공연장까지...? 잘 모르겠네.
그래, 차라리 바이올린 버전이라면 흥미라도 가져볼 텐데, 피아노라면 말이 길어진다.
2. 띄움과 짓누름
일전에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의 마스터클래스에서 “건반 위에서 동그란 물방울을 띄워내는 것이 피아노인가?”라는 문장을 건진 이후로, 나는 피아니스트마다 서로 다른 ‘띄움’과 ‘짓누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곡마다 손가락의 올림, 누르는 압력, 작곡가별 캐릭터가 다 달랐다. 저 연주가는 초연하다, 저 사람은 소년스럽지만 능숙하다, 이 사람은 부채를 한들한들 움직인다, 또 어떤 이는 물방울을 짓누른다. 그래, 나에게 피아노란 결국 비눗방울 수동식 장난감이었다.
그런데 그 디스펜서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내가 판단하는 재미만 있었지, 그 ‘물방울’이 내가 해석할 틈도 없이 이미 물감으로 그려져 있다면? 아, 이거 곤란하다. 이러니 라벨도, 그 라벨을 그려낼 피아노도, 그리 큰 자극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나도 이 생각이 얼마나 큰 부족함—책 한 권 읽고 세상을 다 아는 사람처럼 구는—에서 비롯된 건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딱딱한 관념을 깨부술 요소들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라벨과 피아노를 제쳐둔다면 남는 게 무엇이겠는가. ‘무브먼트’였다.
‘무브먼트’, ‘움직임’. 정말, 내 타임라인 속에 이 무대가 찾아온 타이밍은 다시 생각해도 기막히다. 클래식과 무용의 조합이라니. 한창 그 두 매력에 빠져 있는 지금이 아니던가.
무용을 접하기 전의 나는 어떤 나약함 안에 놓여 있었을까. ‘클래식을 좋아하니까 클래식 공연 위주로만 봐야 내 청취력이나 글감에 좋지 않을까?’ 그렇게 편협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본 발레 공연에서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두둥—내가 사랑하던 선율이 무용수의 손끝과 팔선, 발끝에서 흩어지고 다시 모이며, 끝내 춤으로 노래가 되었다.
그 지점을 온몸으로 깨달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어찌나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무용은 솔직히 ‘수용’이라 이름을 달리해야 한다. 받아들임의 예술이고, 기다림의 미학이며, 선율의 작품이다. 뚫어져라 바라본다고 해서 곧장 어떤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에서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동작을 보며 “아, 뭘까?” 하는 물음표를 띄울 수 있게 된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반기를 들 수도 있다. 새로운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길 수도 있다.
“아, 팔이 저렇게 떨릴 수도 있구나.
날개의 방향이 꼭 등 위가 아니라 가슴팍일 수도 있겠구나.
사람이 사람 위로 저만큼 높게 올라설 수도 있구나.”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었다가, 온점 몇 개로 사그라졌다가, 다시 물음표로 돌아온다. 그 여정이 너무 흥미로웠다.
클래식이 내게 이만큼 다가온 것처럼, 감정과 의지를 동작으로 풀어내는 무용이 내 안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 세계는,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믿었다. 내가 라벨에 삐죽대더라도, 그들이—연주가와 기획자—나를 설득해줄 것이라는 걸. 다들 그러지 않던가. “네가 어떤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 건, 아직 진짜 맛있는 버전을 먹어보지 못해서야.” 그래, 그러니 믿는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의 셰프들은 이전 공연들에서도 늘 좋은 문장을 선사해준 연주가들이 아니던가. 그들의 연주에 친절한 해설자들이 함께한다는데, 놓칠 수 없었다.
이 문장을 내려놓는 지금, 나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어디까지 꾸며낼 것인가.” 그래, 조금 더 솔직히 말해보자. 왜 나는 이 공연을 보기로 했던가. 사실, 이 공연을 결정하게 된 건 한경 arte 칼럼에 실린 더하우스콘서트 강선애 대표님의 [arte] 〈스무 살 하콘〉 기획자 노트를 보고 나서였다.
“스무 해 전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하콘에 들어와 처음 무용 공연 리허설을 지켜보던 자리에서의 일이다.”
하콘에서 클래식과 친구가 되고, 자연스럽게 무용과 인연을 맺게 된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하콘에서 클래식의 진면모를 알게 되고, 클래식과 강강술래를 하다가 무용에 단단히 발목이 잡힌 게 요즘의 나 아닌가.
나도 그의 수순처럼 무용과 클래식이 어디까지 함께할 수 있는지, 호흡에 귀 기울여보고 싶었다. 내 손으로 직접.
3. 박물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현대적이면서도 잔향이 길게 울릴 것만 같은 분위기. 조명이 있는 구역은 하얗고, 나머지는 검은 기운이 올곧게 머물러 있었다. 따뜻하다기보다 탁, 차분하게 가라앉은 조도의 질서가 느껴졌다.
실제로 방문했을 때도 예상만큼 박물관스러웠다. 무대 한가운데 유물을 놓아도 좋을 만큼의 어둑한 운치가 있었다. 콘솔레이션 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붉은 벽돌이 로비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안은 어둠, 밖은 노곤함으로 대비되는 그 풍경이 참 좋았다.
전석 매진된 공연이라 시작 전부터 매표소 앞은 인파로 북적였지만, 대기 동선이 잘 짜여 있어 번잡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티켓을 받기 직전, “사람들이 다 들어갈 수 있나?” 혼잣말을 내뱉었더니 길을 지나던 하콘의 한진희 매니저님이 멈칫 다가오셔서 “다 앉을 수 있어요!” 하고 긍정해주셨다. 장난스레 걱정을 내뱉던 관객 A의 마음이 순간 누그러졌다. (으하하)
운 좋게도 동행과 나는 중간 블록 중앙에 앉을 수 있었다. 좌석 단차가 없어 앞사람의 뒷머리가 몇 번 시야를 가렸지만, 무대를 즐기기엔 충분했다. 오히려 그 자리였기에 볼 수 있던 풍경도 있었다.
오늘의 무대는 연주가와 무용수뿐 아니라, 이 홀 자체가 또 하나의 퍼포머로 기능했다. 공연 내내 사방의 벽면에는 곡마다 어울리는 디지털 아트가 넓게 투사되었다. 곡마다 영상이 바뀌어 “무용수들이 직접 만든 영상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김신중 선생님의 그래픽 작품이었다. 어쩐지, 남다르다 했다.
프로젝션은 벽을 도화지 삼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의 뒷모습 위에도 빛을 맵핑했다. 그리고 아마 의도된 연출은 아니었겠지만, 내 시야에는 형광 연두빛의 네모난 타일들이 앞 관객의 어깨선에서 명치선까지 바코드처럼 천천히 내려앉는 장면이 보였다. 그 모습이 유난히 인상 깊었다.
소리와 움직임이 완벽히 어우러지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여러 번 시선이 영상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커다란 사람의 뒷모습, 파동치는 물결, 흩날리는 잎사귀, 터널과 도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시점, 그리고 지미집 카메라의 새카만 그림자까지. 눈앞에 볼거리가 많았지만, 벽면의 장면들도 꽤 거대한 주인공이었다.
사실, 자리를 잡자마자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것은 무대 중앙 오른편에서 빛을 내리던 거대한 네모 기둥이었다. 그 구조물 아래에는 하얀 대리석과 대비되는 검은 사각 구역이 놓여 있었다. 천장은 어땠던가. 네모난 패턴들이 착시효과처럼 이어졌다.
‘지금 무언가를 보러 왔다’는 감각이 그때 비로소 체감되었던 것 같다. 일상의 시점에서 벗어나, 정지된 순간—누군가의 작품을 보러 온 출발선에 서게 하는 공간이구나.
다만 이곳도 클래식 공연을 위한 장소는 아니었다. 건조한 음향 구조로 잔향이 길게 남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메마름이 적절했다.
라벨의 곡이 워낙 수분감이 가득한 탓일까. 이미 물방울을 다룰 줄 아는 연주가들이 모여 영롱한 호숫가를 그려내니, 청중은 소리와 단절되지 않았다.
네 개의 조명이 비추던 구역, 무용수가 거울을 던지며 피워낸 모랫가루의 장면을 기억하는가. 자글거리고 까끌한 바닥 위에서 그들은 맨발로, 혹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왠지 모르게 나는 내가 알던 라벨의 노랫소리와 오늘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고 느꼈다. 내가 생각한 그는 하얀 파라솔 아래서 차를 마시며 풍경을 감상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라벨은 새카만 공간에서 하얀 조명 하나를 등에 지고 있는 사람, ‘우는 사람’이었다.
뭐지? 공연이 끝난 뒤 동행을 향해, 멍한 얼굴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라벨은 슬픈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이길래 왜 다들 울고 있어요?”
왜 나는 이 물음을 던지게 되었을까. 무엇을 보았길래.
4. 약속한 시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안종도 × 기쿠자와 요시노리
“우아하게 춤추는 공작. (…) 날개를 펼친 우아하고 장엄한 모습과, 날개를 오므렸을 때 목덜미에서 꼬리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을 제 몸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용수의 프로그램 노트를 급히 눈에 담았다. 그는 공작을 묘사하겠구나. 이 프로젝트의 서두를 맡은 만큼,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려는 역할을 맡은 듯했다.
그 생각을 품은 채, 내 앞에 선 그를 한참 응시했다. 그동안 봐왔던 무용 공연의 무용수들은 어떤 모습이었더라. 대개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이는 의상을 입고 있었다. 아주 한들한들, 시간이 혼자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흩날리는 소재이거나, 그라데이션이 섬세하게 스며든 옷들이었다.
그런 재질들만 익숙하게 봐오다가, 갑자기 딱 봐도 하얗고 거친 질감의 ‘옷다운 옷’이 눈앞에 있었다. 상체 위, 가슴선과 팔 위에는 갈비뼈를 형상화한 듯한 문신이 한쪽으로 새겨져 있었다. 깃털이려나, 싶었다.
한쪽 무대 위를 천천히, 힘을 주며, 그러나 보는 이에게는 가볍게 걸어가던 그 사람을 기억한다. 팔을 양옆으로 확 펼쳐 천천히 각기춤을 추듯 근육을 움직이던 몸짓도 떠올린다. 그러다 서서히 아파했다. 어느 순간부터 호흡이 거칠어지며 그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왜 울어. 울지 마. 왜 슬퍼.” 그렇게 한참을 남몰래 달래주다 문득 프로그램 노트를 떠올렸다. 아, 맞다. 그는 공작이었지.
날개를 드러냈다가 다시 웅크릴 수 있기까지 얼마나 아프겠는가. 생살을 찢고 펼쳐내는 일이다. 누가 도와줄 수도 없고, 토닥인다고 아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들이 둥글게 펼쳐진다.
맨살이 저 돌바닥 위에서 한참을 헤맨다. 라벨은 그것도 모른 채 공기 중을 타고 자유롭게 떠다녔다. 그 간극이 있었기에 이만큼 바라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피아노는 나보다 살짝 위에서,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아래에서 받쳐주니, 그 중간에서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물의 유희 — 일리야 라쉬코프스키 × 미사키 아야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는 나에게 ‘건반 위 물방울’이라는 중요한 키워드를 남긴 연주가가 아닌가. 그가 어떤 무대를 펼칠지 내심 기대를 품고 있었다. 오늘 그와 함께한 무용수는 타이트한 흰 나시 차림에, 채도 높은 붉은색을 팔 한쪽에 길게 그려낸 채 무대 위로 등장했다.
“끝없는 혼돈 속에서 빛과 그림자를 가로지르며, 때로는 꿈을 끌어안고, 멈추지 않는 흐름에 몸을 맡긴다.”
혼돈 안에서 꿈을 안고, 흐름에 몸을 맡긴단다. 나는 그 장면에서 연주가들의 꿈을 목격했다. 피아노에 어찌나 가까이 다가가던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악기’와 ‘예술가’ 사이의 거리감이 완전히 무너졌다.
누가 피아노 보면대에 볼을 대는가. 피아노 아래로 깊숙이 몸을 숨기는가. 동공이 풀린 듯 아득한 표정을 짓고 관객을 외면한 채, 제 붉은 팔과 싸우는가. 협응해야 하는 두 팔이 서로 말을 듣지 않아 괴로워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피아니스트의 소리는 어떠했을까. 물방울을 깊게 짓눌러주는 연주가가 곁을 지켜주니, 무용수의 감정선은 더욱 깊숙이 잠기고 논의된다. 갈등과 고뇌보다도 한없이 헤매는 사람이 여기 있다.
두 대의 피아노가 놓인 자리. 피아니스트는 건반만을 바라보며 제 마음을 소리로 대변하고, 무용수는 피아노의 가장 넓은 영역 아래에서 관객에게 등을 보인다. 이봐, 꼭 눈을 맞춰야만 통하는 게 아니라니까.
라 발스 — 최형록 × 이재영, 송예빈
이때의 디지털 아트가 유독 인상 깊었다. 끝없는 터널 안에서 영상이 계속 어딘가로 향해갔는데, 공연 전에 보고 왔던 전시회 ‘임기표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 위에 기계를 얹고 360도 VR 영상으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들이 겪은 공중 폭격을 체험하는 작품이었다. 피가 죽처럼 흘러나왔다던 진주 진치령터널의 장면이 떠올랐다.
흰 셔츠를 입은 무용수와 검은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가 멍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한 채, 두 손을 맞잡고 왈츠를 추었다.
“남녀 듀엣으로 진행되는 이 춤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 앞에서 서로를 붙잡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 이건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저 춤의 끝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소리가 이토록 리드미컬하고 공기를 환기시켜도, 무용수들의 표정과 움직임이 이만큼 비극적이니 차라리 ‘영혼의 결혼식’이라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말하기를 “점점 흐트러지고 망가지는 움직임 속에서도 우리는 끝까지 춤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 단정했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땀이 흘러도 시선은 텅 비어 있고, 동작은 멈춤이 없으니—떠난 이들을 기리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다.
터널을 빠져나와 도로 위로 화면이 전환되어도, 온 세상은 여전히 흑백이었다. 결말이 환하길 기대하면 곤란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무도가 아니겠는가. 웃음을 나눌 여유는 없고, 무너진 것들이 많으며, 저 피아노가 착실히 아래로 삐걱거리며 내려가니 우리는 그저—이대로 잠식되는 것이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어미 거위 모음곡 — 문지영·김태형 × 민사원, 박정빈, 오연, 이우선
“발레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동화적인 판타지를 표현하는 동시에,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라는 장소가 주는 분위기와 라벨의 선율이 잘 어우러지도록 안무를 만들어냈다.”
이 노트를 쓴 민사원 무용수의 말에 나는 ‘그리하셨다’ 조용히 동의했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공간의 잔향에 기대어 소리를 완성하듯, 무용수들에게도 적절한 적막과 고요함, 그리고 조명이 필요하다.
두 명씩 무용수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5막의 구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왼쪽 무대로 이동했을 때는 붉은 벽돌을 배경 삼아 그림자와 함께 긴 춤을 주었다. ‘미녀와 야수’가 사랑을 속삭이던 그 검은 인영들이 떠오른다. 어찌나 다정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던지.
무용수들의 시선에 잔뜩 몰려 있던 찰나, 나는 한 번씩 피아노로 눈길을 돌렸다. 어쩜, 김태형 피아니스트의 손목은 무용수처럼 부드럽게 날아올라, 낮은 음역에서 부채가 한들한들 흩날리듯한 작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여전하시네.
내가 봐왔던 발레의 장면들이 이곳에 어여쁘게 녹아 있으니, 무용수와 관객의 거리감이 보다 분명히 그어졌다. 연결됨이 아니라 나뉨이라니, 그래, 그 말이 맞다. 무용수 두 명이 가까운 자리에서 춤을 보여줄수록 우리는 확실히 다른 세상의 사람임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예뻤는걸. 예뻤어요.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2번 — 이동하·박연민 × 이소미
“예술은 완성된 결과물일 때만 성립하는가?”
그 한 줄의 문장이 나를 흔들었다. 이소미 무용수가 등장하기 전, 프로그램 노트에서 마주한 문장이었다. 내가 오래 품어온 질문이기도 했다.
완성과 완벽은 도대체 무엇인가. 각자 가진 기준이 다수의 동의로 일치하면 그것이 완벽이라 할 수 있을까. 애초에 도달 가능한 지점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미완성이고 불완전한 것일까. 사람은 왜 미완성의 상태를 불안해하는가. 왜 온전하지 못하다는 그 느낌 자체가 인간을 진동시키는가. 완성되지 않은 결과물들은 예술이 될 수 없는가.
그 고뇌의 연속을, 끊임없이 나아가는 사람의 장면으로 그려냈다면, 그것은 곧 ‘끊임없이 사유하는 인간’을 향한 연민의 시선이었으리라.
일부러 눈이 아득할 정도로 강한 빛을 이곳으로 향하게 했다면, 기다랗게 뭉쳐 있던 분홍 리본을 완전하지 않은 울긋불긋한 패턴의, 조금은 못생긴 것으로 택했다면— 무대 밖으로 나갔다가도 결국 조명 아래로 스스로를 내려놓고, 다시 묶여 있기를 택한 생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가 말한 대로, 인간이 예술을 통해 공유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온전히 전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불완전한 얼굴이었고, 불안해 보였지만, 끝끝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나가는 그 모습이 나와 너를 닮아 있었다.
볼레로 — 강혜영·김송현 × 모던테이블 (김재덕, 이어린, 정철한, 엄세영, 이준석, 최형규, 이기영, 김동규, 김경진)
김송현 피아니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를 부여잡은 뒤, 소리를 둔탁하게 만든다. 강혜영 피아니스트가 볼레로의 리듬을 적절히 이끌어주면, 우리는 모던테이블의 움직임에 집중하면 된다.
“구성은 ‘고요함–담겨 있음–움직임–올라감–굳건함’이라는 다섯 단락으로 짜여 있으며...”
나는 그 다섯 개의 포인트에 집중해 그들의 움직임을 길게 기다렸다. 아마 지금까지의 무대 중 가장 ‘무브먼트’적인 요소에 온몸을 기울였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무용수는 여덟 명이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동작을 채워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그들은 각자의 구역 안에서 단순하면서도 날렵하게, 절제된 몸짓으로 춤을 이어갔다. 어느 순간엔 머물러 있고, 또 어느 순간엔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대각선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어딘가를 팍팍 찍어내듯 타격감 있게 움직이면서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모자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붉게 달아오른 피부색과 흘러내리는 땀방울에서 밀집된 힘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소리와 동작, 동작과 소리, 소리와 소리, 동작과 동작—그 나뉜 것들의 이어짐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드디어 신발을 신은 무용수들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발 걱정 금물)
4. 행하신 대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한다. 어쩌다 보니 ‘사진가’로 살게 되면서, 내가 삶의 기능이나 직업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설정된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행동’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종의 ‘상황극’을 즐기는 셈이다. (글: 김신중)
공연이 막을 내린 10월 26일 저녁, 피아니스트와 모든 무용수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공연장은 북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나와 동행은 잠시 자리를 지켰다. ‘뭐가 있으려나?’ 싶어서였다.
그때 내 앞 관객의 어깨 위에는, 조금 전 보았던 형광 연두빛 홀로그램 같은 네모들이 가득 내려앉았다. 바코드를 들고 와 당장 찍어내야 할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둑, 둑, 둑—빛이 질서 있게 흘러내렸다.
28일로 막 넘어온 새벽, 프로그램 북을 덮고 라벨의 곡을 멈췄다. 핸드폰을 들어 방금까지 듣던 엘가의 피아노 퀸텟 1악장으로 곡을 바꿨다. 무용이 끝났으니, 나는 다시 내 일상의 한 면으로 돌아왔다. 뭔가 거대한 결말을 기대하셨나? 이런, 유감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 라벨, 그것도 피아노 품에 안긴 라벨은 여전히 거리감이 있는 존재다. 아무리 좋아하는 연주자들과 기획 속에 있어도, 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말을 이어간 걸 보면, 잊을 수 없는 풍경들이 분명 내 안에 각인된 것이 틀림없다.
여러 번 생각하지만, 무용이란 장르는 내게 참 폭력적이다. 지나치게 아름답고,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너무 많이 만들어 손가락을 이만큼 혹사시킨다.
사실 이번 공연은, 장소의 특성상 이전보다 단순한 감상을 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화려한 음향이나 의상, 서사적 흐름이 있어야 마음이 깊이 녹아든다고 은연중에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틀이 지난 지금(28일 새벽)까지도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다. 아마 그 안의 모든 요소들이 제 몫을 다했기 때문이 아닐까. 무대 위 존재들이 1인분을 못하면 금세 티가 나기 마련인데, 이렇게 평온하게 전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지금이 오히려 감사하다.
누구 하나 튀지 않고, 조화롭게 순간들을 녹여낸 무대였다.
이 글의 서두를 쓰던 즈음, 이 공연에 가장 큰 애정을 가진 분이 SNS에 이런 글을 남기셨다.
“공연 전날까지도 온갖 꿈을 꾸며 시달리던 저에게도 이제 밤의 평화가 오려나요.”
공연이 26일이었으니, 27일은 뒷정리와 두근거림 속에서 보내셨겠지. 그리고 찾아온 밤,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을 것이다. 관객으로서 그 무대를 즐기기만 했던 나와 달리, ‘온갖 꿈에 시달리셨겠구나’ 하는 가느다란 연민이 스쳤다. 동시에, 시니컬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마음이 참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보면 지난 7월부터 지금의 10월까지, 나는 도대체 몇 개의 공연을 보고, 몇 개의 후기를 써왔던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 ‘참 말이 많다’ 싶었다. 이 거대한 클래식 세계에서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인데, 이래도 되는 걸까 자문한 적도 여러 번이다.
음악가들에게는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들이 내겐 동경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요소다. 그런데도 이 앞에 반복적으로 서는 나를 보면, 분명 이유가 있다.
성의.
온갖 꿈에 시달릴 정도로 걱정하는 그 마음, 관객 앞에서 진심을 다해 준비한 사람들의 무대. 영상 하나, 프로그램 노트 한 장에도 정성과 기다란 인사가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공연이 끝난 뒤, 최형록 연주가님과 짧게 대화를 나눴다. 감사하게도 ‘글’에 관한 따뜻한 말씀을 들었다. 나는 좋은 연주에 대한 감사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연주를 하셨으니까,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어요.
나는 상상력이 그리 대단하지 않아요.”
그렇게 연주했기 때문에 이렇게 쓸 수밖에 없고, 그만큼의 성의를 보였기에 나도 같은 성의를 보여야 했다. 보인 만큼 쓰려다 보니, 이렇게나 말이 많아졌다.
그들의 무브먼트만큼의 무브먼트를 원맨쇼로 여섯 번 넘게 펼치려니 혼자 손가락 다이어트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비포 사진을 찍어둘까?)
이상한 소리는 이만큼만 하고… 이 글의 끝에 다다른 지금, 나는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2번’에서 만난 문장을 다시 떠올린다.
“예술은 완성된 결과물일 때만 성립하는가?”
그러게. 나는 이 공연이 꽤 완성된 결과물이라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을지도 모르겠다. 완성이라는 말 자체가 ‘모두 이뤘다’는 뜻이지만, 우리가 언제 그런 순간을 온전히 경험했던가. 우리는 매일같이 이 무형의 것을 추구하고, 반복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들이 아닌가.
결국 우리의 여정은 ‘이뤄내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 그 시간에 머물러 있음 자체가, 어쩌면 ‘완성’일지도 모른다.예술은 결국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며 성립하는 개념일까. 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여정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겠구나.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예술을 사랑하는 바보들이니까. 이 모랫바닥 위에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쓰고 있지. (웅얼웅얼)
참으로, 재미난 세상에 재미난 오늘이다.
아니 그런가?
긴 밤에 놓인 모두,
편안한 꿈에 이르시길. (라벨 씨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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