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함안문화예술회관 9월 하우스콘서트 - 임동민(Violin), 최형록(Piano) 관람 후기
  • 등록일2025.09.29
  • 작성자장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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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함안행을 결정하기까지는 두 가지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임동민의 최근 레퍼토리에서는 보기 드물게 ‘베토벤’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지난 3월 4일에 있었던 임동민 & 최형록 듀오 리사이틀 프로그램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 이유냐고? 이 연주가에게 재방송은 없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 하고 나면 재미없다며 다시는 안 할 것 같은 기세로, 늘 새로운 것만 잔뜩 들고 오셨던 분인데— 웬일로 이번엔 함안 시민들 놀라지 말라고 서정성 짙은 소나타들을 골라 오셨다. 


게다가 이번 듀오는 지난 리사이틀을 함께했던 최형록 피아니스트가 아니던가. 이래저래 내 입장에선 올 수밖에 없는 공연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곡인 풀랑크 바이올린 소나타와 3월 이후 얼마나 친하게 지냈던가. 


이 곡으로 봄과 여름, 그리고 지금의 가을까지 지나오고 있다. 신촌역에서 공덕역으로 향하는 길목, 경의선 숲길을 이 1악장과 2악장의 품 안에서 몇 번을 거닐었던가? 이 곡과 함께일적엔 나는 외로운 적이 없었다. 두 번째 곡, 야나체크도 그렇다. 지난 3월에 가장 인상 깊었다고 내가 스스로 메모해 두지 않았던가. 베토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다. 현대음악을 주무기처럼 다루던 그가, 내가 아는 모차르트와는 미묘하게 결이 다른 베토벤만의 고동색빛 순수함을 어떻게 다뤄낼까. 어떤 모습일까? 많이 궁금했다. 


사실— 나는 길게도 기대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어떤 바람을 품고 있었는지는 속시원히 정의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오늘 어떤 연주를 보여줄까. 듣기로는 미리 정해진 일정이 아니어서, 타이트한 시간 안에 완성도를 끌어올려야 했을 텐데. 그래서 조금 더 숨 가쁘게 연주하지 않을까. 내가 보낸 하루가 급박하니 그 연주도 씽—! 하고 박력 있게 나아가 버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줄을 이었다. 


근래에 가장 최근 공연이 뭐였더라. 이미 지나온 지금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합정 토마토홀에서 현대음악 대파티를 하고 온 이후가 아니던가. 주인공은 무려 슈니트케,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였다. 25년 줄라이 페스티벌에서 만났던 작곡가들을 또 한 번 단독 리사이틀에 데려와, 관객들과 함께 rock and roll 했으니. 오늘도 함안을 그렇게 달구지 않을까. 


이렇게 문장을 나열하다 보니 대충 내 예상의 방향이 그려진다. 올해 다뤄온 곡들처럼 숨 가쁘고 다이내믹하게, 누구보다 바쁘게 음악을 그려낼 거라 생각했다. 그 안에서 내 만족도는 충분히 채워질 거라 믿었고 지나온 공연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순수한 기대만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몰랐다. 공연이 끝난 뒤, 내가 감정적으로 얼마나 내려앉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감정선의 하강? 주로 언제 겪었더라. 생각해 보면, 다른 연주가들의 레퍼토리에서는 한 악장쯤에서 내적 떨림이 잦았다. 이를테면 멘델스존이나 브람스의 실내악, 혹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정도. 애초에 작곡가들이 그런 감정선을 의도했겠지만, 실제 공연장에서 프로들의 손 안에서 높은 완성도로 펼쳐질 때는 다르다. 눈물이 안 나기 쉽지 않다. 이유도 모른 채 마음이 흔들린다. 근데 사실,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나 소리선이 아무리 좋아도— 쉽게 마음이 한들한들 흩날리기는 어려웠다. 음표의 기세가 워낙 강했고, 흐름 자체도 내 안으로 침잠하기엔 지나치게 복잡한 파동을 그려냈다. 


그래서 나는 늘 그의 작품 전체를 하나의 풍경처럼 바라봤다. 음표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음미해 들여놓기엔, 내 세계는 그리 ‘현대음악·현대미술답진’ 않으니까. 그의 소리는 사람 냄새라기보다 시대의 풍경, 음악적 재미였다. 바이올린이 어디까지 소리를 내고, 내 귓가에 어떤 색을 가져오는지를 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날 연주는 이상했다. 거의 초면처럼 담백했고, 전반을 감싸는 정적인 기운이 매우 낯설었다. 소리가, 소리에 깃든 성의가 지나치게 깊어 놀랐다. 하나—하나가 예쁘게 골라 모은 조약돌이었고 그것들이 내 앞에 천천히, 다정하게 하나씩—, 정말 하나씩— 놓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좋아하던 그 파동선도 이만큼이나 여유 공간을 더 내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소리가 나를 기다린다고? 믿기 어려웠다. 3월에는 미미했던 끝음이 또 다른 잔향으로 남아있었고, 음원으로 들을 때는 결코 닿지 못했던 색다른 표현이 가득했다. 마음에 콕 박아둔, 어디냐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장면은 또 다른 형태로, 전혀 다른 결로 내 앞에 있었다. 먼저 달려나갈 줄 알았다.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있다. 그냥, 여기 서서 소리를 앞에 놓아둔다. 충분히, 지금을 지켜준다. 더 앞질러 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가 한 발 먼저 서 있을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아— 뭐지? 이 생각지도 못한, 예쁜 조막만 한 돌들은 뭐지? 한참을 당황하다가 1열 사람들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얼굴에 흐르는 것을 슬며시 닦아내는 이도 있었고, 연주가를 응시하지만 그 시선 끝에는 소리만 가득 담겨 있는 이도 있었다. 내 뒤에는 어린아이와 함께 온 어른도 있었는데, 작게 소근—소근 “왜 이렇게 잘해?”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 멀리까지 내려앉았다가 확— 앞으로 다가올 즈음엔, 어디선가 얕은 탄식도 흘렀다. 


공연이 끝나고는 연주가와 사진을 찍으려는 어머님 한 분이 계셨는데, “제가 찍어 드릴까요?” 하고 먼저 다가가자, 꺄르르— 웃으시며 연주가 너무 좋았다며 기쁘게 말씀하셨다. 그 미소가 너무도 예뻤다. 관객들의 환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몇차례나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을 몇 번씩이나 그려 넣었다. 이 분, 제가 연주 몇 번 들어봤는데요— 오늘 공연, 정말 세심하게 준비하신 것 같아요. 어떻게든 이 말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을 만큼 그 날, 9월 하우스 콘서트 연주가들의 정성은 대단했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이 예뻐서 그토록 마음을 담았을까. 나는 그 장면들을 가능한 한 길게 묘사해보고 싶어졌다.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글을 쓰며 스스로에게 자신할 수 있는 문장 하나가 있지 않던가. 적어도 내가 가면 그날의 연주는 추억이 된다. 그 연주가 내 마음에 깊게 남으면, 나는 기꺼이 내 시야에 담긴 것들을 당신에게 전할 수 있다. 그게 내가 가진 거의 유일한 자신감이겠다. 


자, 말을 이렇게 했으니 이제는 그들이 어떤 연주를 펼쳤는지 자세히 설명해봐야 하지 않겠나. 

임동민(Violin), 최형록(Piano)의 25일 함안 공연은 이러하였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제8번 G장조, Op.30 No.3 ] 

I. Allegro assai — 아주 빠르게 새침하게 시작하는 첫 멜로디에서 이 공간의 특징이 드러난다. 어, 여기도 외롭다! 무엇이 외로운가? 소리다! 다만 그 내버려두는 성질이 합정 토마토홀과는 다르다. “네가 알아서 해라”라는 문장 자체는 같은데, 말투나 사람이 다르다. 토마토홀이 성마른 목소리로 “아, 몰라. 네가 알아서 하셈 ㅇㅇ.” 하면서 아주 넓다란 모랫바닥에 소리를 던져놓는 기분이라면, 이곳은 다정하게 웃지만 기가 센 교수님 같다. “음, 기회는 줄 테니, 그어내는 건 본인 능력이에요.” 하면서 좋은 장비와 아이보리 벽으로 둘러싸인 동그란 홀 안에 밀어 넣는 느낌이다. 


예술가의 집이나 예술의전당 같은 곳은 대체로 소리를 꽤 완만하게 감싸주며, 관객에게 너무 직선적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울려주는 편이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소리를 ‘방치’해 아무런 필터 없이 연주자를 드러내는 공연장은 좋으면서도 얼떨떨하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예리하게 모든 걸 다 읽어내도 되나 싶을 정도다. 그런 와중에 바이올린이, 마치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충분히 예리한 바늘을 들고 베토벤 1악장에 들어선다. 울림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울려가는 과정이 전부 ‘full HD’여서 귀가 매우 생소했다. 소리가 서서히 커져가는 길도, 사그라드는 모습도 모두 보인다. 이거 뭐지? 싶은데, 날이 막 포장지에서 개봉된 듯, 새벽 공기처럼, 단잠에서 깬 아이의 발걸음처럼 세차게 생글거리니 낯섦이 두 배다. 


속도감은 어떤가? 막 웃어주진 않아도, 먼저 가버리진 않는다. 충분히 리드미컬함을 느낄 수 있는데, 중간중간 빗금처럼 날아오를 뿐이다. 다시 돌아온 또 한 번의 드높임은 아까보다 강하게 다가오는데 그 음량이 온전히 귀에 꽂히니 이상하다. (너무, 너무 음질이 좋아 ;;) 소리의 끝이 날카로워지고 음이 높아질수록 선명도는 더해진다. 피아노가 달리고, 바이올린이 자잘하게 지글거리는 구간이 있다. 확— 바닥으로 내리꽂는 듯한 순간. (아 뭐지? 이 정성??) 소리 컨디션이 너무 좋은데? 피아노가 얇고 맑게 트릴을 흘리며 길을 걷는 사이, 바이올린이 갑자기 높은 춤을 피아노와 나누다가 바닥에 세 번, 드릴을 박듯 내려친다. 그러고선 아무 일 없다는 듯 높이 올라선다. (아 뭐지? 뭐지??) 


 서서히 눈치채기 시작했다. 소리가 이렇게 분명한 건, 공간의 역할도 있겠구나. 그리고 오늘 저 바이올린, 컨디션이 확실히 좋다. 지금 엄청 신경 써서 음표를 얹고 있다. 오늘 진짜 뭔가 있다!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베토벤에는 초록빛이 스며 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 음색이 바닐라빛처럼 부드러운 건 아니다. 그냥, 원래 시니컬한 사람이 시간을 조금 더 내어주는 정도의 기다림이다. 끝음조차도 흘려보내지 않고 하나하나 다 붙잡는다. 


 II. Tempo di minuetto, ma molto moderato e grazioso — 미뉴에트의 속도로, 매우 절제되고 우아하게 이 악장을 예습할 때, 가장 궁금했던 건 “어떻게 나긋나긋 길을 거닐까?”였다. 특히 듣기 좋은 부분이 반복될 때마다 어떻게 풀어낼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마음에 담을 자리를 남겨두고 싶었다. 그런데 아까 1악장에서 머물러 있던 ‘기다림’이 이 2악장에도 있었다. 내겐 꽤 곤란했다. 왜 이렇게 갑자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을 시간을 줄까? 왜 먼저 나아가 소리로 길을 열지 않을까? 시범을 보이는 대신, 내 뒤를 잠자코 따라온다. 얇게 겹치던 것이 어느새 두세 겹으로 늘어나 있다. 저 바이올린과 저 피아노가 한 마디씩 숨을 나눠 갖는다. 이리 한번, 저리 한번 말을 주고받다가 점점 짧고 굵어진다. 물방울 네댓 방울이 떨어지더니 첫 반복이 온다. “이제 어떻게 노닐지 지켜보자” 하는 재미가 생긴다. 한 번의 숨, 두 번의 숨, 길이만큼 늘여놓는다. 아직은 익숙한 형태라 괜찮다. 음을 위에서 아래로 톡-톡-톡 두드릴 때도 재미가 있다. 다시 돌아온 피아노와의 대화. 그대로 띄워진 상태에서 소리는 점점 더 새침해지고 선명해지다가 굵어지더니, 다시 나긋한 발길로 이어진다. 반복이 돌아왔다. 이번엔 조금 더 고동빛을 띤다. 피아노도 따뜻하게 굵어졌다. 바이올린은 이전보다 훨씬 길게 목가적인 선을 끌어낸다. 이어서 음을 지그재그로 상승시키는데, 하나하나가 분명히 찍힌다. 어쩜 그 짚어지는 점들이 다 보일까?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다시 Z형으로 올라서고, 특유의 박자감으로 당겼다 내놓는다. 약하게 시작해 점점 짙어지다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 부드럽고 강하게 다가온다. (ㅠㅠ) 하나하나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 (눈물버튼) 또 돌아온 반복. 여전히 나긋하지만 마냥 온정으로 감싸는 것은 아니다. 그냥 뒷길을 지켜낼 뿐이다. 그러다 조금 더 분명한 목소리로 영역을 넓힌다. 피아노에게 짧게 시간을 내주고, 다시 숨을 나눠 갖는다. 물기를 아래로 톡-, 톡-, 톡- 떨구면, 내가 마음에 담아온 순간들이 그어진다. (...) 아, 진짜 뭐지? 내가 예습했던 버전은 이렇게까지 건조하지 않았다. 더 잔향을 이어붙이며 흐름을 만들었는데, 그는 왜 이렇게 내려놓을까? 정말 갑자기, 정지. 그 자리에서 시작하더니, 정지 상태에서 소리를 놓는다. 음을 그대로 잇지 않고 하나씩. 분절해 내려 놓아 잔향이 닿기 전에 여백을 남긴다. 하나, 다음, 그리고 또 다음. 딱 필요한 만큼만 이어붙이고 나머지는 개별로 떼어낸다. 그러고는 높이 노래한다. 이 짧게 나누는 형태로 반복이 다시 온다. 왜 점점 작아질까? 아까 잇지 못한 것들이 여기서 모두 하나가 된다. 여전히 날고 있지만 소리가 두터워져 안정감 있게 생동한다. 모차르트가 아니라 베토벤이기에 가능한 이 리듬감이 너무 좋다. 아까의 바이올린은 어디로 갔을까? 네 겹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또 한 번의 반복은 피아노의 선창과 바이올린의 뒤이음으로 메워진다. 마무리는 어땠던가? 초록빛이 여전히 여름처럼 새초롬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내 쪽이다. 그런 그를 가만 지켜봐주는 건 피아노다. 두 사람이 화음을 이룬다. 


 III. Allegro vivace — 활기차고 빠르게 딱, 적절한 세기로 젠틀하게 전진하는 두 사람이다. 바이올린이 음을 짚어낼 때마다, 연주자가 얼마나 얇고 세심하게 하나씩 내놓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듣는 내내 기분이 좋다. 아- 대접받는 기분. 특정 연주가의 공연을 많이 다니다 보면, 대단한 테크닉 사용 여부 보다도 오늘의 기류를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어떤 기분으로 연주하는지, 어디에 신경을 쓰는지를 알 수 있다. 


오늘은 어떤가? 보다 좋은 컨디션으로, 보기 좋은 소리를 편안하게 함안에 전하고 있다. 피아노와 경주하듯 내달리다 갑자기 두어 번 지직- 내려찍는 부분이 있다. 뭐야, 음원에선 이런 걸 못 들었는데. 역시, 공연장에 직접 두 발로 와야만 들리는 재미 포인트다. 베토벤은 멜로디를 반복하고 변주하며 달려나간다. 비슷한 부분이 계속 돌아오는데 점점 흥이 오른다. 조금 더 자잘하게 달려보고, 힘도 조금 더 줘본다. 발걸음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책임지고 찍어내준다. 우리는 신나게 흥에 오르면 된다. 


그 와중에 피아노가 장난기 어린 기운을 내며 병정처럼 콩쾅거린다. 그 기세에 바이올린이 열띠게 호응하다 점 몇 개를 찍고, 함께 날아가 버린다. - 베토벤과 야나체크 사이에서 - 어머; 난 당연히 다음 곡이 바로 이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잠시 무대를 비웠던 임동민이 바이올린과 활을 한 손에 들고, 무대 한쪽에 놓여 있던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뭐야, 진행도 하시네? 항상 무대에서 음악만 하던 모습을 봐왔지, 이렇게 직접 곡 설명을 하는 모습은 실제로 처음 본다. 그런데 막상 그 장면을 직관하니, 아— 아는 사람이 사회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 클래식 연주가라 하면 보통 목소리보다는 악기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던가? 낯익은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든 낯선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는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첫 함안 방문의 소회와 함께 첫 곡의 선곡 이유를 설명했다. 본식 전 ‘에피타이저’처럼 가볍고 경쾌한 분위기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8번으로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곡이 가진 밝음과는 달리, 베토벤은 이 시기에 이미 청력 상실이 시작되어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작곡된 작품이 바로 암울한 분위기의 월광 소나타다. 그는 유서에서 청력 상실로 너무 힘들었지만, 음악을 작곡하고 몰두하는 순간만큼은 가장 자신답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이런 고통 속에서도 밝은 곡을 쓸 수 있었던 건, 그 열정 때문 아니었을까— 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어 두 번째와 세 번째 곡에 대한 설명이 뒤따랐다. 야나체크와 풀랑크는 앞선 베토벤과는 100년 이상 시대적 차이가 나는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인데, 두 작품 모두 세계대전을 겪으며 쓰여져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담고 있다. 야나체크는 체코의 작곡가로, 민속적 선율을 고스란히 녹여내어 지역적 색채를 짙게 드러냈다. 하지만 이 곡을 쓸 당시, 전쟁으로 인해 심적으로 크게 괴로워했고, 실제로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귀에 맴돌았다고 한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과 그의 고통이 곡 곳곳에 투영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무겁고 암울한 기운이 흐르지만, 그 안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은가— 라고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과연 임동민의 야나체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젠 마이크를 내려놓을 시간이다. 



 [ 레오시 야나체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JW VII/7 ] 

 I. Con moto — 움직임을 가지고 3월에 이 첫 그어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형태를 표현하자면 네임펜으로 긋는 정도겠다. 저 멀리, 내 시선보다 훨씬 아래쪽에서 팔 길이 하나만큼 이어지는 것이다. 그새 아는 곡이 되었다고, 이 1악장이 마냥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니 웃기다. 당신이 이 1악장을 듣는다면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소리가 어떤 감정선을 타고 미묘하게 아우성치는 듯한 기분을 느껴보는게 좋다. 흘러가는 대로 귀에 담고, 시선을 멍-하니 두다 보면 마음 한가운데쯤 무언가 담기기 시작하는 게 분명 있다. 마침, 오늘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예리한 날을 신경 써서 챙겨오지 않았던가. 


두 번째 그어짐이 이어지고 분위기는 점차 혼란과 가녀림 사이를 오간다. 그 대비가 극명하니, 내려앉는 포탄들이 터질 때마다 귓가에 박혀버리는 극적성이 상당하다. 본질은 ‘이명’을 닮아 있으나, 저 '목소리'로 그려내는 것은 악기가 내뱉는 ‘비명’과 ‘아우성’ 언저리의 ‘서정적 혼돈’이다. 그 지점을 명확히 살려내는 활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연주자가 말했던 것처럼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순간의 반짝임이 머물러 있다. 잠깐의 진정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두세 겹의 두터운 선을 잊지 않는다. 


 II. Ballada — 발라드 잠시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하얀 마음들이 이제는 눈앞에 놓인다. 차분히 가라앉아도 되고, 그 선의 끝을 잡고 함께 걸어도 된다. 무대는 예민한 기운으로 당신에게 닿을 준비가 되어 있고, 연주자 역시 이 길을 충분히 이끌 준비가 되어 있다. 첫 곡의 베토벤은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이제는 기다란 이어짐 안에서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차례다. 눈을 감고 들어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소릿길이 옷자락을 붙잡듯 얇게 사그라들었다가, 투명도를 낮췄다가, 불시에 명료해진다. 붙잡으려 하면 뒷걸음친다. 한참을 머물다 보면, 피아노와 함께 뚝—뚝— 소리를 떨어뜨려 놓기 시작한다. 하나씩, 또 하나씩. 그 간격은 늘 이 정도로만. 그러다 점점 거세지며, 눈이 부실 만큼 빛을 내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악장 안에서 우리는 단절될 수 없다. 연주자는 끝까지 집중을 잃지 않고, 활로 숨을 내려놓는다. “이렇게 하면 된다. 이 아래로,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천천히 따라가면 된다. 이윽고, 저 아래에서 솜처럼 맑게 피어나는 것이 있다. 그러다 저 천장까지 날아오르는 줄기가 있다. 그 광경을 지켜볼 무렵, 음은 관객 사이를 타고 다니며 서정의 끝자락으로 치닫는다. 날것의 소리가 더 깊이 찌르며 도달하려는 지점을 더 크게 울려낸다. 그 예민함이 좋았다. 이 예민함이 공연장을 가득 채우며, 관객 품 언저리에 있을 때는 포근한 담요처럼 따뜻하다가도 이내 겨울 바람처럼 시리게 사라져버린다. 


 III. Allegretto — 조금 경쾌하게 이제 다시 포탄이 던져진다. 이 순간, 공연장이 여전히 매서운 공간임을 잊지 않게 한다. 더 받아쳐줄 듯하면서도 내버려두는 기색이 여전하다. 공간은 연주자가 연주에 집중하지 않으면 “절대 도와주지 않겠다”는 듯 완고한 기운을 내뿜는다. 연주자는 그 사실을 아는 듯, 활에 선명도를 더 깊게 얹는다. 저 멀리 날아올랐던 것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기운으로 변한다. 바이올린이 울고 있는 장면을 본 적 있는가? 내가 듣고 있는 건 눈물길이다. 단순히 맘 놓고 흐르지 못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지금 그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바이올린의 몇 번의 토닥임과 피아노의 긴 잔향이 지나간 뒤, 또 다시 포탄이 터진다. 


 IV. Adagio — 느리게 꿈에서 깨어난 사람 같다. 어찌 됐든 이건 현실이 아닌가. 정신을 놓아서는 아니 된다. 비장한 기운을 머금은 채, 눈을 마구 비벼대는 소리가 있다. 응축된 회오리가 성숙한 기세로 앙웅앙울 타오른다. 그 대비가 또렷하다. 때로는 가냘프게 서서히 상승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닥을 짓밟아 버린다. 당황하지 말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유리 구슬 몇 개가 가만히 놓여 있다. 그걸 주워도 좋겠다. 길을 잃을 확률은 적으니 걱정하지 마시라. 저 바이올린이 우리를 끝까지 충실히 데려다줄 테니. - 야나체크와 풀랑크 사이에서 - 관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가득하다. 무슨 대화일까? 내가 딱 들어놨다. “잘해… (웅성웅성), 잘한다… (웅성웅성)” (진짜로!) 전쟁 소나타를 막 끝내고는, 다시 나긋나긋 진행을 이어가는 임동민 연주가님. 이번에는 풀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는 20세기 프랑스의 작곡가로,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작곡되어 비극적인 분위기를 품고 있다고 했다. 이어 현대음악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바흐·모차르트·하이든·헨델·베토벤 같은 익숙한 고전 작곡가들과 달리 현대음악은 난해함이 두드러진다. 풀랑크 역시 현대음악으로 넘어가던 시대를 살았지만, 실험적 추구보다는 멜로디를 잘 활용하는 쪽을 택했다. 성격 자체가 유쾌한 사람이었기에 밝고 경쾌한 곡이 많았으며, 그가 가장 존경한 작곡가도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신동으로 불린 모차르트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상 아무리 유쾌한 성격일지라도 어둠이 스며들 수밖에 없었고, 그 면모가 자연스럽게 녹아든 곡이 바로 이 바이올린 소나타다. 이 작품은 풀랑크의 유일한 바이올린 소나타로, 전쟁으로 희생된 스페인 시인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헌정곡이다. 특히 2악장에는 스페인 민요 선율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은근히 밝고 재치 있으며, 듣기에 신나는 분위기로 다가올 수도 있다. 연주자는 “1악장에서는 웃으면서 눈물 흘리는 듯한 기분을, 2악장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가득한 흐름을, 그리고 3악장에서는 천진난만함이 극에 치닫는 순간을 느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바로 이 3악장에 역설적인 지시어가 있다. 작곡가는 ‘비극적으로’ 연주하라고 남긴 것이다. 덕분에 3악장은 날아갈 듯 밝아지다가도, 어느 순간 곤두박질치는 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그게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아닌가 싶다”라며 연주자는 말을 맺었다. 



 [ 프란시스 풀랑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FP.119 ] 

 I. Allegro con fuoco — 불같이 빠르게 저봐라, 저만큼 몰아새워서 시작한다. 3월보다 훨씬 더 날아다니며 무게가 가벼워졌다. 미세하게 튕겨내는 소리까지 다 받아내는 공간이 주어져 있으니 망설일 기운 자체가 없다. 피치카토가 이렇게 하나하나 선명하게 들릴 수 있나 싶었다. 원래는 한두 개 정도는 구슬 모양 자체가 작아 묻히기 마련 아닌가? 그런데 여긴— 뭐, 전부가 1등석이다. 이러니 농익은 치정마저 아주 분명하게 올라섰다 찍어 내려온다. 부드럽지만 가만두지 않고, 얄상하여 쉽게 붙잡히지 않는다. 소리가 사그라질 틈을 주지 않는 무대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을 이렇게 다 기록해도 되나 싶을 만큼 모든 음이 분명하게 박힌다. 


 이 악장의 중반부에 내가 특히 좋아하는, 특유의 리듬감이 몰려 있는 구간이 있는데 그 부분이 이렇게 음표마다 또렷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어떤 연주는 묵음 처리하듯 뒤로 가 있지 않았던가? 여기서 절면 바로 티가 날테지. 확- 올라타는 구간마저도 예외는 아니다. 힘을 잃는 순간, 기세에 기가 죽는 순간, 바로 지는 게임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질 리가 있겠어?) 바이올린이 높게 날아오를 수도 있지만, 내 명치 정도의 위치에 머물며 안정감 있게 마음을 눌러주는 소리도 있다. 그 겹은 꼭 4개 이상일 것이다. 기억하시라, 오늘의 연주가는 관객에게 긴 기다림의 시간을 준다. 원래도 여유 공간을 어느정도 내어주는 분인데, 이날은 마지막 끝음의 잔향조차 금세 떠나가지 않았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천천히 내딛다 보면 예쁜 실 하나가 바닥 위로 놓인다. 집는다고 당장 당겨지지 않는다. 다만 충분히 아랫곡선을 염두에 두고 선율을 이끌어나가니, 관객은 그 안에서 저마다의 틈을 가질 수 있었다. 아— 나 왜 왔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거 만나러 왔네. 


 II. Intermezzo — 간주곡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이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기분이 이상했다. 사실 내가 함안까지 왜 왔던가? 풀랑크 2악장과 꼭 인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와 꼭 다시 만나, 그날처럼 마주 앉아 인사하고 싶었다. 특히나 2악장 중반부— 오랫동안 마음을 담아오던 그 부분. 지난날 긴긴 산책 속에서 이 악장을 들으며 얼마나 바닥을 내려다보았던가? 그 선율이 다시 피어난다는데 내가 어찌 오지 않을 수 있을까. 


3월의 꽃이 9월에는 어떤 마음으로 피어날까. 짧은 정적 속에 많은 물음표를 머릿속에 띄운 채 피아노의 건반 방울을 기다렸다. 작은 튕김을 잠시 기다리면, 낮은 목소리가 익숙하게 다가온다. 원래보다 음색이 더 분명하고 나긋하다. 그러다 보면 놓을 수 없는 것들이 생긴다. 오늘의 연주자가 매우 디테일에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어디서 알 수 있을까? 사그라질 법한 마지막 음을 끝까지 놓지 않고, 피아노가 혼자 길을 떠나는 순간에도 꽃잎처럼 끝끝내 소리를 쥐고 있다 살짝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저 멀리 가 있다. 확- 내질러 닿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저 위에 있으니, “여길 보면 된다”는 듯 부드럽게 일러준다. 오늘은 그냥 내가 먼저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 다만 이미 떠나간 이를 그려야 하는 정경들이 있지 않은가. 같이 엉엉 울어주는 것보다, 이렇게 울 수 있는 길을 내어주니 더 좋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6개월 만에 다시 만나는 친구가 내 앞에 서서히 다가온다. 나는 시선을 떨군다. 연주가는 눈을 감는다. 소리만이 남는다. 아— 뭐지? 3월의 너는 조금 더 노래했는데, 9월의 너는 왜 여기— 선율이 되지 않고, 그대로 나타나기만 하는가? 무언가를 전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그저 또 하나의 조약돌이 내 앞에 놓여진다. 하나씩, 하나씩. 충분히 음미할 시간들이 내 앞에 놓인다. 


오늘만큼은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라. 쉬이 지나가지 않는다. 숨도 한 번 고를 수 있는 공간이 여기 있다. 붙잡으면 붙잡는 대로 머물러 있고, 놓으면 또 그대로 금세 떠오른다. 죄책감도, 공허함도 남지 않는다. “그냥— 여기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위로가 되는 순간이다.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듣고도 지금이 아쉽지 않았다. 이미— 지나왔던 길 아닌가. 그리웠던 마음과 반가운 감정, 또 그 안에서 새롭게 피어난 표현들이 뒤섞여 결국, 이곳에 와야 했던 이유를 본질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빛을 자잘히 반사하며 이만큼 내어주는구나. 바이올린이 작게 내미는 화살 하나가 있음을 아시는가? 시작은 구슬로, 멀지 않게 날아가다 이 악장과 이별하니 귀 기울여야만 한다. 


 III. Presto tragico — 비극적으로 매우 빠르게 이제 원래의 흥으로 내달릴 차례다. 잘 오셨다. 이 연주가는 현대음악과 다이내믹을 아주 능숙하게 다룬다— 내가 보장할 수 있지. 경극이 취미인 사람이다. 빠른 템포에 음표가 밀집되면 오히려 선명도가 더 강해진다. 음이 흥에 실려 오르면, 입꼬리를 올려 활과 현을 제 손안에서 신나게 괴롭힌다. 


(다 보여) 피치카토가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드러나는 공연장이 또 있을까? 음질, 실화냐? 더군다나 이날 내가 여유 공간이 넓어진 것에 감동받은 이유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원래 그는 뭐든 1.2배속으로 몰아붙여 관객을 숨 가쁘게 만들던 사람이 아니던가. 타자로 치면 550타. 나는 이제 애국가 1절을 쓰고 있는데, 그는 이미 2절을 시작해버린다. 그렇다고 무조건 달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날카롭게 치고 빠지기 때문이다. 버려진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내가 허겁지겁 던져지는 소리를 주워 담느라 정신이 없는 것뿐이다. 아까 경극이 취미라 했는데, 그 지점은 이렇게 드러난다. 


바쁜 스캣을 밟다가도 순식간에 2악장의 면모가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노래하다가 일순간 독백체로 긴 선을 이끌어오는 것. 그 느낌을 아시는가. 소리는 피아노와 함께 숨소리를 닮았다가, 몇 겹의 활털이 되었다가, 잠시 우쿨렐레가 되기도 하고, 격정의 소프라노가 된다. 그러다 결국 내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온다. 냉담하고 큰 발자국으로 바닥을 내리찍은 뒤, 한 번의 도닥임과 엇갈림, 예리함으로 소리와 멀찍이 이별한다. 피아노가 그 길을 더 길게 이어주면 이 길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짝짝) 



[ 앙코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로망스 (영화 '등에' 모음곡 중) ] “앵콜 뭐하실 거예요?” “아마 쇼스타코비치…” 이번 앵콜은 사실, 서울 하콘 와인파티에서 살짝 힌트를 미리 얻어갔다. (음하하) 저 이 곡 두 번 들어요. 여러분, 난 두 번이야! (음하하!) 이봐, 확실히 다정한 무드에선 공간도 부드럽게 뒤따라 준다니까. 


날카로움과 예민한 기색은 잠시 접어두고, 편안하게 이 밤을 내려앉는 시간이다. 다채로운 빛을 띤 채, 바이올린은 통나무빛 계열의 온화함을 풀어낸다. 보다 넓은 마음으로, 두 팔 벌려 내어주는 것들이 있으니— 사람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이 다락방에 모여든 것 아니겠는가. 마지막에는 저렇게 아름다운 피치로 이별을 건네준다. 


[ 앙코르. 마누엘 폰세 - 작은 별(Estrellita) ]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한 곡 더 해야지. 관객들도 “앵콜, 앵콜” 기분 좋게 외치고, 연주가들도 맑게 웃으며 다시 보면대와 피아노 앞에 섰다. 곡 시작하기 전에 직접 제목도 일러주니 얼마나 좋은가. 어, 우리 같은 사람은 안 알려주면 절대 몰라요 (찡찡). 


이 곡은 3월 4일의 마지막 앵콜곡과 동일했다. 어때,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마찬가지로 3월의 나와 9월의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되는지 비교해보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3월 마냥 다정하지 않은 듯 곧게 뻗어오는 직선. 그 직선이 띄워 놓은 따뜻한 빛이 좋다. 참 신기하다. 날 한껏 째려보는 것 같은데, 왜 다정하게 느껴질까? 별이 꼭 다섯 꼭짓점 모양일 필요는 없다. 뻗어오는 그 ‘선’ 자체가 하나의 별이다. 그 자체로 길고 넓게 빛을 내어주고, 길을 내어준다. 이미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별이다. 아, ‘이정표’겠다. 나를 찾으러 온 누군가에게 말없이 방향을 일러주는 무언가. 눈을 맞춰주지 않아도, 특별한 표현이 없어도, 그 선은 내가 닿고자 하는 곳을 가리켜준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다 보면 저 멀리 보이는 것이 있다. 눈이 아득할 만큼 강렬한 빛은 아니지만, 그 존재만으로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무언가. 길을 잃지 않도록, 시리도록 선명하게 짚어주는 ‘선’의 소리. 한 번은 웃어주기도 한다. 장난스러운 생각이 스친다. 끝자락에 펼쳐지는 네 갈래와 피아노의 두근거림. 그리고 그렇게 또 사라져버린다. 남겨진 건 나뿐이다. 이번 공연은 유난히 여러 번 나를 남겨놓는다. 


하지만 끝은 미소다. 9월 도닥-도닥- 부드럽게 가라앉으며 다가오는 곡선. 그 곡선이 내리쬐는 온정 어린 빛이 좋다. 참 신기하다. 소리가 한껏 드높아지고 있는데, 왜 이렇게 다정하지? 별이 곁에 없어도 매일 고개를 들어올릴 필요는 없다. 뻗어오는 저 ‘선’ 자체가 내 작은 주머니 속에 숨겨둔 별이다. 그 자체로 힘이 되어주고, 늘 여기 머물러 있음을 일러준다. 이미 그것만으로 또 하나의 별이다. 아, ‘편지’겠다. 나를 찾으러 온 누군가에게 말없이 마음을 전해주는 무언가. 눈을 맞춰주지 않아도, 같이 길을 걸어주지 않아도, 그 선은 내 뒤를 가만히 따라와준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다 보면 저 멀리 보이는 것이 있다. 눈이 아득할 만큼 푸르고 따뜻해서, 뚝-뚝- 마음에 내려앉게 하는 무언가. 길을 잃지 않도록, 놀라지 말라 속삭이듯 다가오는 ‘선’의 소리. 아, 이렇게 웃는구나. 마음이 이상하다. 끝자락의 물러섬 속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갈래와 피아노의 다독거림. 그렇게 또 끝이 다가온다. 또 나만 남았을까? 아니. 이번에는 아니다. 여기 이렇게, 편지가 있지 않은가. 


공연이 끝나고, 어김없이 관객과의 짧은 만남 시간… 이 오기 전 함안 하우스콘서트는 관객이 직접 의자를 정리한다 (!!!).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친구와 함께 무대 오른편 의자탑 위로 의자를 하나씩 얹었다. (대박) 무대가 정돈된 후 오늘의 주인공들이 다시 나타났다. 단체 사진 시간인 줄 알았는데, 감사하게도 개별적으로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는 자리였다. (역시 하콘) 


한 걸음 물러서 기다리는데, 어머니 한 분이 혼자 서 계시길래 (신난 마음에) “사진 찍어드릴까요?” 하고 먼저 여쭈었다. 그러자 냉큼 다가오시더니, 오늘 연주에 칭찬 세례를 퍼부어주셨다. 덕분에 나의 낯가림은 한순간에 풀려버렸다. 어머님은 나와 콩트를 하시다가 내가 함안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눈치채셨으며 “아이, 예쁘다” 칭찬까지 해주셨다. (심쿵) 그 순간 기분이 얼마나 좋았던지? (어머니, 제게 함부로 칭찬해주시면 안돼요. 전 박제합니다!) 담당자분들이 포토그래퍼 역할을 해주셔서 직접 찍어드리진 못했지만, 좋은 공연을 보고 한껏 기뻐하시던 그 표정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렇게 기다리는 사이 내 차례가 왔다! 오늘의 주역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또 찍어드리며, 바쁘게 그날의 막간 ‘하코너’ 역할을 했다. 아~ 예쁘게 웃어보세요~ (어색한 미소 금지) 들고간 편지지 위엔 ‘오늘 무대의 TMI’를 적어달라고 요청드렸는데, 전반적으로 완벽한 공연이었는지 무대 위 TMI는 사라지고, 굉장하고도 아주 놀라운 소식이 적혀 있었다. 놀라지마시라. 엄청난 TMI일테니... 뭘까? “아… 더웠어요.” (으이구!) 


사인도 받고 나니, 나는 최애에게 오늘의 ‘디테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공연이든 정성과 준비는 기본 이상이었지만, 오늘따라 음표 하나하나가 너무 세밀하게 가공되어 있어서 뭐랄까—얼마나 더 성의를 보이려는 걸까 싶었다. 정말, 어쩜 그럴 수 있지? (대박 칭찬해) 지난번 토마토홀에서 들었던 슈니트케 바이올린 소나타 2악장의 숨자국 같은 연주였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연주가님이 “그렇게 어둡게 들렸어요? 안 되는데” 하셔서 (아니, 아니, 디테일이요. 표현력이요!) 라고 급히 정정했다. 내가 이렇게 말주변이 짧다. 


오랜만에 함안을 방문하셨다는 강선애 대표님께 다가가 사진을 함께 남겼다. 내가 여기까지 왔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악동처럼 웃고 있는 내 모습에 속내가 다 드러난 것 같아 우스웠다. (ㅎㅎ) 밤이 늦었는데도 시간을 내준 하콘 덕분에, 무대가 끝난 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기쁨을 온전히 만끽했다. 그날, 우리는 저마다 이름표를 달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관객, 그들은 연주자, 대표님은 기획자. 무대에서 만나고 무대에서 아쉽게 작별한 우리는, 함안이 아닌 또 다른 장소에서 다시 마주할 날을 웃으며 약속했다. 이것 봐, 우리는 이렇게나 낭만적인 순간 속에 머물러 있다. 


터덜 터덜, 아까 그 어둑한 길을 친구와 다시 거닐었다. 무대가 끝나고 나니 이번엔 또 다른 의미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시작 전에도 마음이 무거웠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확실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밤 공기가 개운하게 스며드는 만큼 피로가 해소되었으면서도, 좋은 음악을 마주한 뒤에만 찾아오는 묘한 가라앉음이 있었다. 너무 많은 성의를 건네받아 마음 안에 예쁜 조약돌이 가득 차 올랐다. 마치 두 손 모아 퍼 올린 시냇물을 고이 받아 든 듯한 기분 이랄까. 아, 이거 보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잘 왔다… 그 말만 입가에 맴돌며 좀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 치즈볼에 캔맥주를 마셨는데 나의 친구는 이번에도 후기를 아주 제대로 남겨주었다. 어디 한번 들어볼까? 


1) 베토벤 나비가 날아다니는 느낌. 난 약간 힘들 때 대책 없는 희망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곡이 딱 그래서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어. 해맑고 희망 찬 노래라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노래 자체는 괜찮더라. 연주는 확실히 잘했어. 첫 곡은 희망찼는데, 두 번째는 전쟁 곡이었어. 베토벤 연주할 때 동민님 표정이 엄청 밝아서 ‘오늘 기분 좋은가 보다’ 했는데, 두 번째 곡부터 표정을 쓰는 걸 보고 아, 표정을 진짜 잘 쓰시는구나 싶었어. 두 번째 곡이랑 세 번째 곡이 둘 다 전쟁과 관련된 곡인데, 분위기가 서로 달라서 신기했어. 

2) 야나체크 설명해준 게 좋았어. 끝끝내 희망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곡 자체도 쉽지 않았어. 무엇보다, 이 곡 듣다가 허리 부서질 뻔. 

3) 풀랑크 세 번째 곡은 특히 인상적이었어. 1악장은 그냥 순식간에 지나가버렸어. 근데 2·3악장은 확실히 좋더라. 2악장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밤이 돼서 ‘일단 자야겠다’는 씁쓸함과 아련함이 있었어. 3악장은 반대로 엄청 밝게 시작했어. 처음엔 ‘오고야 말 행복, 언젠가는 맑아질 날’을 떠올렸는데, 갑자기 격정적으로 바뀌더라. 아, 처음의 밝음은 꿈이었구나. 꿈에서 깬 순간 여전히 지옥 같은 현실. 갑자기 북받쳐서 물건을 던지는 듯한 분노의 폭발. 그리고 다시 잔잔해지면서 감정이 치솟았다가 비워내는 느낌. 그래서 3악장이 제일 좋았어. 풀랑크는 마치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 해결된 줄 알았는데 사실은 꿈이었음을 깨닫는 기분. 그래서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3악장에서 한꺼번에 쏟아내고, 결국 비워내며 끝나는 것 같았어. 그게 진짜 인상 깊었어. 마, 이게 내 친구다. 


모두가 떠난 26일, 우리는 여전히 함안에 있었다. 숙소 근처 고분군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무진정에서는 사진도 남겼다. 예상치 못한 현지인 한식 맛집에 들러 배를 두둑하게 채우고,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운치 있는 카페 소파에 기대 앉아 식곤증에 헤롱거리기도 했다. 돌아가는 길엔 “조금은 걸어보자” 하며 무려 47분이나 되는 시골길을 걸었다. 길 중간마다 은행이 족히 백 개는 떨어져 있는 구역이 나타나, 우리는 마치 게임하듯 긴장감 넘치게 뛰어넘으며 길을 헤쳐 나갔다. 


오후 3시, 숙소에 들러 짐을 챙겨 나온 뒤 택시를 타고 함안역으로 돌아와 역내 카페에서 귀여운 강아지와 잠시 시간을 보내고 오후 4시 7분, 우리는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집에 갈 때도 ‘오늘의 글을 써야지’ 다짐했는데, 창밖엔 초승달이 일찍이 떠 있었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예쁜 하늘빛이 내 시선을 몽땅 앗아갔다. 사실 무엇보다도, 뭔가를 적기엔 음미하느라 바빴던 날이었다. 찍은 사진도 아직 다 열어보지 못했다. 1박 2일 여행은 그 일정을 소화하기 전에는 길게 놀다 오는 것 같지만, 막상 당일이나 2일 차가 되면 무엇을 했는지 모를 만큼 짧게만 느껴진다. 


이번 역시 그랬다. 짧아서 더 오래 남는 여행. 가는 길에는 4시간 동안 글에 매달리느라 내가 어디까지 내려왔는지조차 체감되지 않았다. 카카오맵의 한반도 지도 사진을 보고서야 ‘내가 거의 끝까지 내려왔구나’ 실감했고, 또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것 같은 낯선 지명들이 줄지어 이어진 것을 보며 다시 한번 실감했다. 사람 사는 동네는, 결국 다 비슷하지 않은가. 


처음 출발을 결정했을 땐 ‘어떡하나, 이게 정말 맞는 선택일까?’ 한참 고민했었다. 결국 그 고민 끝에 ‘향한다’를 선택했고, 지금 이렇게 돌아와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다. 불현듯 찾아오는 웃음들이 있어 참 기쁘다. 초반에 내가 뭐라 자신했는가? 바로 이렇다. 적어도 내가 가면 그날의 연주는 추억이 된다. 그 연주가 내 마음에 깊게 남으면, 나는 기꺼이 내 시야에 담긴 것들을 당신에게 전할 수 있다. 


좋아하는 연주를 잊지 않도록 붙잡아 두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에게 멋진 추억 하나를 선물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지금 나는 행복하다. 삶의 방향을 넓혀간다는 건 뭘까? 무언가를 택함으로써 얻게 되는 또 다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주 사소한 계기가 인생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거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물음표 하나가 또 다른 발걸음을—이를테면 서울에서 함안까지—내딛게 한 것은 아닐까? 


만약 누군가 “넌 음악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내가 정말 이 ‘클래식’을 좋아하는 걸까? 그렇게 대단한 걸 마음에 담아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가 마음속에 품은 건 무엇일까? 아마 클래식을 둘러싸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리’와, ‘긴 시선’이 아닐까? 때로는 연주가들이 음악을 삶으로 삼고, 그 곁에 머무는 것만 봐도 부러울 때가 있었다. 나도 이 곁에 머물 수 있을까?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까? 그 소심한 발걸음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건 아닐까. 


인생이란 뭐든 선택하기 나름이라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나름’일 줄은 몰랐다. 말간 마음이 차오른다. 나는 도돌이표처럼 같은 말을 되뇌기 시작한다. 


 “아... 가길 잘했다. 응— 진짜 잘했다.” 

 뽀얗고 하얀 조약돌 몇 개를 몇 번이고 꼭 쥔 채.



댓글

2개의 의견이 등록되었습니다.
하콘 2025-10-14 15:35:41
장유진 님 :) 멀리 함안까지 와주시다니 정말 감동이었어요. 관람후기 처음 쓰신 아트인사이트 글도 보았는데, 숙소로 고생도 하셨더라구요. 그래도 좋은 기억으로 마음에 담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콘은 이렇게 지역에서의 공연 확장으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앞으로도 많이 응원해주시고 지켜봐주세요 🥰
2025-11-01 00: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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