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과 하우스 콘서트
- 등록일2013.02.17
- 작성자유준상
- 조회2539
라면과 하우스 콘서트
-어서와-
‘라면 먹고 갈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던진 유명한 대사다. <하우스 콘서트>라는 이영애처럼 예쁘고 생소한 공연이 나를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인 상상의 멘트이기도 하다. 음악을 들으러 집으로 직접 찾아가는데 라면 정도는 얻어먹고 와야 하는 거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나는 그 집으로 끌려들어가면서 오만가지 생각을 한다. 라면만 먹고 갈 것인가, 아니면 또 영화처럼 ‘자고 갈래요?’ 하면 어쩌지.
그런데 왜 하필 라면이 생각났을까. 라면과 음악의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을까. 우선 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음악은 샤머니즘적인 종교행사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춤을 추고 제사를 올릴 때 막대기와 돌멩이를 두드리고 손가락에 풀잎을 끼워 불며 연주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양이나 돼지 같은 짐승을 잡았으며 의식이 끝나면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대부분의 제사는 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닌 노여움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다시 현대로 넘어와서 개인이라는 내면에 존재하는 신에게 우리는 음악과 라면을 바친다. 라면은 간식도 되고 주식도 되며 떡, 만두, 해물 등의 재료로 변화무쌍한 만능식품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은 개인의 서정이 상실되어버린 이 시대에 그 노여움을 풀고자 자신의 집에 제단을 쌓아놓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 아닐까. 뭐, 집에서 라면 정도는 끓여줄 수 있으니까.
어느 집 지하의 마룻바닥에서 공연은 시작되었다. 나는 친구와 다리를 쭉 뻗고 널브러져 앉아 이승원씨의 비올라와 박종해씨의 피아노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음악에 대한 느낌을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몸이 반응해서 고개를 흔들거리거나 너무 좋았어요 라고 밖에는. 그래서 다시 라면을 이야기한다. 어이없게도 라면과 음악의 근본적인 동일화를 꿈꾼다. 함민복 시인의 <라면을 먹는 아침>을 인용해본다.
<라면을 먹는 아침>
함민복
프로 가난자인 거지 앞에서
나의 가난을 자랑하기엔
나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지만
신문지를 쫙 펼쳐놓고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
라면을 먹는 아침
반찬이 노란 단무지 하나인 것 같지만
나의 식탁은 풍성하다
두루치기 일색인 정치면의 양념으로
팔팔 끓인 스포츠면 찌개에
밑반찬으로
씀바귀 맛 나는 상계동 철거 주민들의
눈물로 즉석 동치미를 담그면
매운 고추가 동동 뜬다 거기다가
똥누고 나니까 날아갈 것 같다는
변비약 아락실 아침 광고하는 여자의
젓가락처럼 쫙 벌린 허벅지를
자린고비로 쳐다보기까지 하면
나의 반찬은 너무 풍성해
신문지를 깔고 라면을 먹는 아침이면
매일 상다리가 부러진다
우선 비올라와 피아노의 탱탱한 면발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현대의 음악과 라면은 가난이라는 공통분모의 발견에서 시작해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음악을 찾는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것이 마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함민복 시인은 아침부터 라면이라니, 분명 가난의 고수다. 더군다나 자신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다니, 음악을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
비올라와 피아노가 펄펄 끓기 시작한다. 감정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해 미친 듯이 날뛴다. 극한 감정의 증폭을 위해 시인은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넣는다. 분명 물도 잔뜩 부어넣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초고수의 경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신문지를 까는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 위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친구와 싸운 일, 실패한 연애, 좌절된 꿈, 동경과 불안, 끝이 안 보이는 취업난, 안아줄 수 없는 양극화, 등등 혼란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이때 음악은 위로가 되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라면은 곧 음악이 될 수 있으며 바닥에 깐 신문지는 개개인들이 눌러앉은 이곳의 마룻바닥 같이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박수를 친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풍성한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고픔은 계속해서 사무치기 때문에 계속 박수를 치고 앙코르 연주를 듣는다. 연주자와 나와의 거리는 냄비를 뒤적거리는 젓가락과 내 입의 사이쯤 된다. 바닥에 흘리는 면발 하나 없이 음악을 후루룩 빨아들였다. 고개를 흔들며 눈을 감고 사흘 굶은 거지같이 음악을 퍼먹었다.
공연이 끝나자 와인을 마시는 뒤풀이 자리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쓸데없는 얘기를 하며 즐거워보였다. 친구와 나는 이곳에 있는 술이 다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마시자고 다짐했다. 와인으로 얼큰해질 무렵 오늘 공연을 한 김종해씨가 피아노연주를 시작했다. 우리들은 술안주로 그의 음악을 들었지만 음악에 취한 그는 음악의 안주로 우리들의 감정을 뜯어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모든 것이 안주로 보인다는 헛소리다.
마지막으로 다시 영화<봄날은 간다>로 되돌아와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대사를 떠올린다. 사랑이 변하는 것인지, 사람이 변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하우스 콘서트>에서 며칠 굶어도 될 것 같은 음악들을 배불리 먹고 왔더니 변하지 않아야 할 게 있고 변해야 될 것도 있었다. 그래 나도 누군가에게 따끈한 국물 같은 글을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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