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미르호>를 타고 음악의 바다를 항해하다
  • 등록일2013.01.19
  • 작성자이유정
  • 조회2527
<율하우스>에 도착하기 전까지 하우스콘서트라는 말은 아예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동생 친구가 집에서 콘서트를 한다기에 호기심에 따라갔을 뿐이었지요. 막상 가서 보니 동생친구 집은 아니더군요.
<율하우스>를 보고 집처럼 오붓하고 아담한 콘서트장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 각자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관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니, 문화충격 그 자체였지요. 어마어마하게 놀랐지만 촌스러워 보일까봐 짐짓 하우스콘서트에 익숙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앉을 자리를 스캔해보았습니다. 공연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빈자리가 연주자들 바로 옆자리뿐이더군요. 일단 비어있으니까 앉았는데,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제가 얼마나 좋은 자리에 앉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연주자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덕분에 그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뚫어지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정면에 앉아서 그렇게 뚫어지게 보았다가는 연주자도 저도 함께 민망해졌을 겁니다. 하지만 옆자리라서 마음 놓고 그들의 움직임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음악에 풍덩 빠질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 건반이 언제 세게 눌려지고, 어느 부분에서 흐르듯 훑고 지나가는지, 뿐만 아니라 느리게 때론 빠르게 나를 몰입시키는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지요. 바이올린의 현을 누를 때, 줄을 튕길 때, 손가락으로 빠르게 음을 옮길 때마다 바이올린 연주자의 하이힐 각도가 계속 바뀌는 것도 하나의 연주처럼 느껴졌습니다. 초등학교 때를 마지막으로 본 적이 없었던 멜로디언은 또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모릅니다. 웃으면서 멜로디언을 관악기라고 말한 작곡가 겸 연주자 김재훈씨의 말처럼 멜로디언을 불 때마다 그 들숨과 날숨이 연주자의 얼굴과 내 가슴을 터질 듯 부풀어 오르게 했으니까요. 연주자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음표로 바뀌어 귀로 들어오는 신비한 경험은 하우스콘서트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우스 콘서트 첫 경험을 <티미르호>의 음악으로 치른 것도 큰 행운이었습니다. 배의 이름이라는 <티미르호>의 뜻에 걸맞게 하우스콘서트 장은 하나의 커다란 배였습니다. 콘서트장에 앉아있는 관객들은 모두 배에 올라탄 승객들이었고요.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는 꼭 그렇게 느꼈습니다. 우리나라부터 세계 곳곳은 물론, 과거, 현재, 미래까지 넘나들며 여행하는 배에 올라탄 기분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익숙한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으로 부드럽게 우리를 태운 티미르호는 <무무>라는 곡을 통해 바흐가 앉아있는 의자 앞으로 우리를 데려갔습니다. <무무>를 들으면서 저는 의자에 앉아 곡을 쓰던 바흐가 커피 한잔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다음 곡 <터키의 연인들>은 너무나 신나게 웃으면서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이라는데, 정말 그런가봅니다. 멜로디언 남자가 목소리를 깔고 말합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면 바이올린 여자가 묻지요. “오빠가 뭘 잘못했는지 알기는 알아?” 멜로디언과 바이올린이 오가며 언쟁을 벌이는 동안 피아노는 흥겹게 싸움판을 깔아주는 듯 느껴집니다. 그리고 싸움의 절정, 터키 행진곡의 들썩이는 멜로디가 싸움을 유쾌하게 만들어주지요. 싸워봤자 연인들의 사랑싸움은 알콩달콩 행복한 싸움이니까요.
다음으로 이어진 곡 <비밀 연회장>과 <작은 곡예사>는 하나의 연결된 스토리 같았습니다. 티미르호 안에 숨겨진 연회장으로 똑똑 두드리고 들어가 조심스럽게 춤을 추다가, 곡예사의 위태로운 공연을 때로는 신나게, 때로는 가슴 졸이는 마음으로 구경하는 느낌이었지요. 특히 바이올린을 똑똑 하고 두드리듯 연주하는 기법이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지은씨는 저 같은 문외한은 처음 보는 기법을 다채롭게 구사하시더군요.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연주할 때의 그 화려한 연주 실력이란, 보고 듣는 내내 딱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이지은씨의 바이올린 덕분에 <티미르호> 음악의 이미지가 더욱 풍성하고 생생하게 와닿았지요.
<지고이네르바이젠>으로 뜨겁게 달궈진 분위기를 차갑게 식히기 위해 준비했다는 티미르호의 겨울 3부작 <북극의 연인들>, <폭설>, <폭설2>는 이번 항해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언 마음을 녹이듯 조용하게 파고든 <북극의 연인들>은 같은 연인시리즈인 <터키의 연인들>과는 또 다른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각인되었습니다.
티미르 호의 모든 연주가 좋았지만 <폭설>은 가장 기억에 남는 곡입니다. 어려웠던 시절, 작업실에서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 폭설을 보고 쓴 곡이라는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듣는 내내 아무도 없는 밤 골목길에 서서 하염없이 하얀 눈을 바라보듯 외롭고 가슴이 찌르르했습니다.
<폭설2>는 뉴질랜드 Mt.쿡에 쌓인 폭설을 보고 썼다고 하시더군요. 지구 반대편의 눈 쌓인 산을 떠올리며 피아노 연주를 들었는데 <폭설>과는 조금 다르지만 여전히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흠도 티도 없이 두텁게 쌓인 새하얀 눈이 주는 정서는 우리나라나 지구 반대편이나 비슷한가 봅니다.
또 다른 폭설을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연습곡을 지나 어느덧 티미르호의 항해는 <꿈>과 <하얀새>로 서서히 마무리되어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음악과 그 여정이 모두 꿈이기라도 했던 것일까요. 피아노와 바이올린과 멜로디언의 앙상블이 몽환적이면서도 아련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하얀 새>를 들을 때는 폭풍이 오지 않으면 날 수 없다는 새 알바트로스가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창작의 고통과 외로움이라는 폭풍을 타고 날아올랐을 작곡가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담긴 곡이었습니다.
모든 공연이 끝나자, 어쩐지 아련함과 쓸쓸함. 이런저런 감정이 뒤엉켜 이대로 하우스콘서트장을 나서기가 무척 아쉽더군요. 이렇게 날것으로 살아있는 음악을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앵콜을 연호했고, 문 밖을 나섰던 티미르호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와 신나는 <티미르 탱고>를 연주해주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공연을 보면서 느낀 건데, 연주 순서도 엄청 센스있으시더라고요. <티미르 탱고> 덕분에 들썩들썩 제대로 신나게 즐겼습니다. 고급코스 요리를 먹고 마지막에 아이스크림 디저트를 먹은 것처럼요.
그런데도 아쉬워서 한 번 더 앵콜을 불렀습니다. 이번에는 문 밖에서 한참을 안 들어오더니, 뒤늦게 돌아와 앵콜을 한번만 부를 줄 알았다며 <터키의 연인들>을 연주해주었습니다. 아까는 신나게 웃으면서 들었던 곡이었는데 다시 들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좀 더 음악적으로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역시 다시 들어도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행복했습니다.
어디서 들어도 <티미르호>의 음악은 나를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아직 채 서른도 안 된 젊은 음악가가 이렇게 자유자재로 이미지를 구사해내고 그 안에 깊은 감정을 담아낸다는 것이 저는 무척이나 놀랍고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티미르호>의 음악을 들은 곳이 하우스 콘서트장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하우스콘서트장이 아니었다면 <티미르호>의 이미지를 이토록 생생하게, 이토록 섬세하게 전할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관객과 연주자가 하나가 되어 빠져들 수 있었을까요? 물론 저는 콘서트장을 아주 많이 다녀본 사람은 아닙니다만, 연주자와 관객 사이가 멀면 멀수록 감동도 어쩔 수 없이 반비례한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비싼 돈 내고 R석을 예매하려고 하지요. 하지만 하우스콘서트에서는 모든 자리가 다 R석이더군요.
콘서트가 끝나고 간단하게 열리는 와인파티에서 저는 딱 한잔을 마셨습니다. 기분 좋게 취할 수 있는 딱 한잔. 와인 한 잔 덕분에 오늘의 콘서트가 숙성되어 더욱 오래오래 오늘의 감동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득 하우스콘서트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본 글귀가 떠오르네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음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악보에는 없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하우스콘서트장만큼 그 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악보에 없는 음악의 진면목을 만나기 위해 앞으로 제법 자주 하우스콘서트장을 찾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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