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으로 치는 피아노 (301회 김예지, 김정준 님 연주회 관람 후기입니다.)
  • 등록일2012.01.19
  • 작성자임병걸
  • 조회2685
영혼으로 치는 피아노

                                                2012.01.19

그녀를 포위했던 어둠
건반 위에 손이 닿는 순간
두 줄기로 갈라지고
관객들은 하나 둘
피아노 선율을 따라
그녀의 우주로 빨려 들어간다

동심원으로 퍼지는 환한 소리는
그녀가 캄캄한 세상에 보내는 초대장
눈부신 태양에 가려
빛나는 밤 하늘의 별
보지 못하던 사람들
감았던 눈 활짝 뜬다

그녀의 피아노는 머릿 속에 있고
그녀는 가슴으로 피아노를 친다
그녀의 피아노 소리는
귀로 들어오지 않고
핏줄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든다

눈으로만 보고
귀로만 들었던 소리가 전부인 사람들
눈 감을수록 또렷한 저 소리
살갗을 스치는 저 소리
굳어진 세포를 깨우는 저 소리

그녀가 눈물과 고통, 환희와 꿈을 버무려
차려놓은 세상 가장 아름다운 식탁
포식한 영혼 두둥실 날아오른다

                    @@@

    
그녀의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연주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나는 온 몸에 끈적끈적 들러붙은 선율을 떼어내기가
힘겨웠습니다.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감동의 크기는 얼마큼일까?
한 인간이 넘을 수 있는 시련의 높이는 얼마큼일까?
한 인간이 이뤄낼 수 있는 예술적 성취의 경지는 어디까지일까?
한 인간을 장애와 비장애로 나눌 수 있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일까?
세상에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는 어디일까?

그녀의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 내 두귀는 때로 폭풍같이 몰아치는 현란한 선율과
때로 개울물처럼 흘러내리는 감미로운 선율에 붙잡혔지만
머릿 속에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념이 가득 밀려왔습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나는 집에 돌아와 가만히 책상 앞의 컴퓨터를 켰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판을 두드려보았습니다.
오타 투성이였습니다.
군대시절 처음 타이프라이터를 배웠으니 줄잡아 30년을 넘게 자판을 두드려 왔는데
아직도 내 손과 머리는 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제 구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뼘 반에 불과한 자판도 눈 감고는 두드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88개의 건반이 놓인
150센티미터나 되는 피아노를 눈 감고 연주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악보를 보지 못하고 건반을 보지 못하는 그녀는 도대체 베토벤과 슈베르트와 쇼팽의 저
어려운 곡들을 어떻게 외우고 익혔을까?
도전과 실패, 좌절과 극복, 고통과 환희, 그녀가 걸어 왔을 피아니스트의 길에
아롱아롱 뿌려졌을 눈물과 웃음이 눈에 선했습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해왔고,
또 너무 쉽게 보는 대로 세상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음악은 악보를 통해서만 익혀야 하고, 건반은 눈을 통해서만 보고 두드리는 것이라고
그저 관성처럼 생각해온 것이 아닐까?

인간은 태양이 눈부시게 대지를 비추는 대낮을 우주의 본 모습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사실 우주가 그 광대무변한 실체를 드러내는 때, 그 위에 은하수가 흐르고 무수한 별들이
빛의 향연을 벌이는 때는 보잘 것 없는 태양이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사방에
어둠이 깔리는 밤입니다.
하여 철학자 우석영은
"밤이야 말로 우주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때인만큼 어둠이 아니라 밝음으로 불려야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서양 철학의 핵심 주제가 된 존재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정말
실체일까요? 또 눈에 보이는 것이 정말 전부일까요?

그녀가 첫번째로 연주한 것은 일생동안 가혹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작곡을 했던
악성 베토벤의 피아노 소타나 17번 템페스트였습니다.
29살때부터 작곡가로서는 치명적인 난청을 앓았던 베토벤이 병세가 나빠지면서 충격과
고통 속에서 헤어나기 위해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기세로 작곡했다는 설이 있는
불후의 명곡입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음악이라는 교향곡 9번 합창을 쓸 당시 베토벤의 귀는
완전히 안들렸다고 하지요.
도대체 이런 악조건 속에서 한 시간이 넘는 교향곡의 작곡이 가능할까요?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로망롤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만약 하느님이 인류에게 저지른 범죄가 있다면 가장 큰 범죄는
  베토벤에게서 귀를 빼앗은 것이다."

정말 우리가 눈과 귀와 코와 입과 피부로 지각하는 세상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세상임에 틀림없습니다.
분명 보여지는 것 그 너머에는 더 큰 세상, 더 완전한 세상이 있습니다.

김예지 님이 연주한 두번째 작곡가 슈베르트 역시 평생을 병마와 가난 속에서 살다가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보석같은 곡을 남겼습니다.
세번째로 들려준 쇼팽 역시 천재적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뜬
비운의 작곡가 였습니다.

위대한 세 작곡가들이 육체적 고통과 결함, 그리고 빈곤 속에서도 불멸의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이들의 머릿 속에 혹은 영혼 속에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상과는 또 다른
유토피아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그 유토피아를 음표와 선율 그리고 피아노라는 악기로 구현한 도구 역시
눈과 귀, 손과 발이 아니라 그들의 빛나는 영혼, 음악을 향해 불타 오르던 심장,
끓어오르던 피, 그리고 끊임없이 샘솟는 상상력이었을 것입니다.

하도 고통스러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던 베토벤은 1819년 한 백작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 인간은 고뇌와 환희를 겸유하도록 태어 났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 중에서 몇사람만은 고뇌를 통해서 환희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위대한 작곡가들이 안고 있었던 육체적 결함과 경제적 고통은
오히려 이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 몸으로 느끼는 쾌락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 너머의 세상,  음악 너머의 음악을 보기 위한 운명적 조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예지님의 연주를 들으면서 그녀의 손을 타고 동심원으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이
더욱 가슴을 파고 들었던 까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손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 앞에 놓인 피아노는 허상일 뿐, 그녀 머릿 속에는 더욱 영롱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가 놓여 있고 그녀는 손가락이 아니라
그녀의 심장의 피로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던 헬렌켈러는 그녀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 우리 몸엔 여러 기관이 있건만 오로지 눈과 귀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도시의 보도를 걷는 것과 시골길을 걷는 것이 다르다는,
단지 다르다는 것 외에도 여러 차이가 있음을 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들은 내가 온몸으로 내 주변 상황에 반응한다는,
다시 말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는 것 같다."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 마침 숲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를 만났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별거 없어"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나는 앞을 볼 수 없기에 다만 촉감만으로도 흥미로운 일들을 수백가지나
찾아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오묘하게 균형을 이룬 나뭇잎의 생김새를 손끝으로 느끼고,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껍질과
소나무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껍질을 나는 사랑스럽게 어루만집니다."

그녀의  연주 중간에 베토벤의 아름다운 가곡 아델라이데에서 우리 가곡 목련화까지
네곡을 들려준 바리톤 김정준 님 역시 감동이었습니다.
이미 안드레아 보첼리를 통해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그 고운 음색에 온 몸이 달아올랐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장애를 가진 것은 피아노와 성악을 들려 준 그들이 아니었고
나였습니다.
세상을 보는 편협한 눈,  함부로 내리는 평가, 너무도 쉽게 체념하는 나약한 의지,
플라톤의 표현에 의하면 살고 있는 동굴의 우상에 사로잡혀 동굴 밖의 무한한 세상을
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하는 존재,
두분의 음악가는 여지없이 어둡고 음습한 동굴을 무너뜨렸습니다.
대낮의 눈부신 태양에 가려 밤 하늘 우주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나를 무한의 우주로
안내했습니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음악으로 차려놓은 식탁에 초대받은 나는 행복했습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아 강원도 산골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이제 제대를 앞둔
아들과 함께 한 자리였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들도 깊은 울림이 있었나 봅니다.

입추의 여지 없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요?
작지만 아늑한 공간을 꽉 채운 청중들은 등받이도 없고 환기도 되지 않아 답답한 공간에
두시간 가량을 앉아 있는 것이 고역일텐데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두분의 음악가가 차려놓은 정성스런 식탁을 남김없이 비웠고
두분의 쉐프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화려한 무대도 널찍한 객석도, 고급스런 장식도 없는 이 작은 공간이야말로
세상 어떤 콘서트 홀보다 아름답고 빛나는 무대였습니다.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가 되고 관객과 관객이 하나가 되고 음악과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가 되는 소통의 장이었습니다.

음악은 참으로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한 감동으로 서로 소통하게 하며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며 희망을 줍니다.

이 아름다운 공간에 초대받은 안내견들, 두분 예술가들의 든든한 발이 돼주고
빛나는 눈이 돼 주는 안내견들,  주인이 연주하는 동안 다소곳이 앉거나 편안히 누워
연주를 듣는 모습도 흐뭇했습니다.

베토벤은 음악을 포기하고픈 유혹이 찾아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자신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해주고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너는 행복한 인간이다.
   그보다 더 좋고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

  베토벤처럼 자신의 불행을 오히려 예술적 성취를 이루는 자양분으로 삼고
  그 성취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두 분이야말로 세상 가장 건강한 분들입니다.

  니체는 묻습니다.
  " 당신은 지금 어떤 사막도 옥토로 만들 수 있을만큼 풍성한가?
    아니면 어떤 옥토도 사막으로 만들만큼 메말라 있는가?
    당신이 고통받고 있다면 결핍이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 "

   가진 것이 많으면서도 옥토를 사막으로 만들만큼 메말라 있는 현대인들,
   고통의 원인이 과잉이면서도 결핍이라고 주장하는 나,
   어제의 연주회는 함부로 흩어져 있는 내 영혼의 옷매무새를 바로 하게 해 주었습니다.

   두 분의 연주를 올해 또 듣기 기대하며 더욱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우스 콘서트에서 두 분의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이번에는 아내와 세 아이들과
   달려가겠습니다.


                                                                       - 여의도에서 goforest 合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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