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웠던 깜짝 만남
  • 등록일2011.06.26
  • 작성자배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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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람을 소개받는건 참 즐거운 일입니다. 상대방의 사전 정보 없이 무작정 만나보라는 말만 믿고 만남의 자리로 가는 경험은 일상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 시간이 될 때까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기대감을 갖는건 하루하루 비슷한 일상 속에서 꽤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자! 막상 그 만남의 시간이 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많은 분들이 비슷한 경험이 있으실겁니다.

하우스콘서트의 약간은 짓굳은,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공연이 과연 무엇일까 기대하면서 업무를 서둘러 마치고 하콘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어린 연주자일까? 나이가 지긋하신 연주자일까? 혼자나올까? 너무 많은 연주자가 출연하지는 않을까?  여러 경우를 생각해보는 사이에 제 기대감은 점점 올라갔지요. 솔직히 그 자리에 오신 여러 관객분들이 어떤 연주를 기대하고 오셨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공연 시작시간이 되었고, 인사말씀을 간략하게 하시고 드디어 검은 장막이 열렸습니다. 10대의 어린 연주자가 소개를 받고 들어왔을 때 어떤 실력을 갖추었길래 하콘의 이런 특별대우(!)를 받고 등장할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피아니스트 윤아인. 피아노로 걸어들어오는 그녀는 검고 곱슬거리는 허리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인상적인 어린 소녀였습니다.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바흐를 연주하는 강렬한 터치가 귀에 쏙 들어왔지요. 이렇기 때문에 하콘의 재미있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구나!

프로그램도 아주 대담했습니다. 바흐로 시작하여 리스트와 드뷔시를 거쳐 라흐마니노프로 이어지는 다양한 성격의 작곡가의 곡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어있었습니다.  특히 리스트의 "위로"는 평소 무척 듣고 싶었던 곡인데 이날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어서 매우 기뻤습니다. 이곡을 듣고 있으면 정말 따뜻한 손이 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져주면서, 괜찮아 괜찮아 하고 안심시켜주는 기분이 들거든요. 어른이 되어가면서 점점 더 복잡하고 어릴 땐 생각치도 못한 상황을 마주하며 세상이란 힘들구나하며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간 가운데에도 이런 곡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알게 되어간다는걸 보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듯합니다. 따뜻하고 사려깊은 곡에 이어지는 곡은 제목 일부에 Etudes라는 단어가 과연 어울릴까 싶은 무시무시한 음표들이 들어차있는 리스트의 Grandes Etudes de Paganini 였습니다. 실제로 악보를 본 적은 없어서 오선지 위에 얼마나 많은 음표가 있을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피아니스트의 손이 검고 하얀 건반 위를 오가는 것만으로도 그 규모와 더불어 연주자의 연습량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은 듯했습니다.

드뷔시의 곡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드뷔시 특유의 몽환적인 느낌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단단하고 검은 피아노로 물결을 일으켜 공연장을 제 머리 속 어딘가에 있는 물가로 옮겨놓았습니다. 작은 연못가에서 나긋나긋한 버들가지로 얌전히 물을 튕겨 작은 물결을 일으켜, 고요한 물결이 일정한 파동이 이어나가는걸 지켜보기도하고, 그 위에 작은 잎사귀를 띄워 찰랑이는 물 위에서 춤추게도 합니다. 그러다가 커다란 호수로 자리로 옮겨 이번에는 굵은 막대기로 거칠게 물을 헤집어 놓습니다. 아니면 거친 바다였는지도 모르지요.

쉬는 시간동안 친구들과 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들 깜짝 놀란 눈치였습니다. 무엇보다 어린 피아니스트의 어마어마한 파워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체구가 큰 남자 피아니스트에 못지 않은 힘있는 연주가 뽀얀 팔과 손에서 나온다는게 대단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크고 많은 사람들이 가득 찬 연주장도 꽉 채울 듯한 강건한 음악을 기대하며 2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들을 땐 왠지모르게 매우 다양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차갑고 매서운 겨울같다가도, 아주 나른하고 매마른  남캘리포니아의 정경도 떠오릅니다. 라흐마니노프가 말년에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배경을 생각하면서 그의 곡을 들어서 그런걸까요? 사실 그의 곡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은 저에게는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게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곡도 아름다우면서도 유려하다가도 순간순간 외로움과 고통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연주를 들으면서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곡의 여운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곡이 끝나고 연주자가 음을 지그시 이어나간다든지 마지막 음표와  첫번째 박수 사이의 여운과 감동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이 어우러진 그 순간을 매우 좋아하거든요. 특히 리스트의 위로는 곡의 잔향을 깊이 들이마시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를 지어 아쉬움이 더했습니다.

연주자가 많이 긴장을 했다는데, 아마 윤아인양의 연주 중에 이런 재미있는 상황이 처음이었을 듯합니다. 빨간 객석이 멀찍이 있는 무대도 아니고, 친구들이 있는 연습실도 선생님이 계시는 곳도 아닌, 자신이 나오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방석을 깔고 앉아있는 앞에서 연주를 하는 일은 그리 평범한 상황은 아니겠지요. 아무리 상황을 사전에 알았다고 해도, 프로연주자도 하콘의 관객을 처음 마주했을 때 매우 당혹스러울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피아니스트 윤아인양과의 오늘의 소개팅은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른 연주장에서도 어서 만나보고 싶은 멋진 연주자였으니까요. 여러 시대의 음악을 들려주면서 자신의 역량을 한껏보여준 연주자에게 내가 보낸 박수가 충분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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