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자격증
- 등록일2010.06.20
- 작성자현진
- 조회3928
부모님께서 하우스 콘서트를 다녀와서 일주일 내내 그것만 자랑하셨는데 오늘 드디어 저도 하우스 콘서트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공부하는 딸 몰래 다녀온 것도 섭섭한데 다녀와서는 자랑이라니, 일주일 내내 원망 많이 했는데 이제 이런 좋은 음악 들려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드네요.
클래식 음악, 어렸을 때부터 그건 너무 어려운 주제였어요. 그래서 뭔가 저에겐 클래식 음악이
아름답게 나이든 여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려하고 고상하며 정제된 아름다움을
가진 우아한 중년의 여성의 느낌이요. 그래서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는 항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과 고상함에 당황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오늘 하우스 콘서트에서는 클래식 음악의 그 고고함에 당황하지도, 빈틈없는 아름다움에 기가 죽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나도 나이가 들면, 따라잡을 수 없다고 느꼈던 그 고상한 중년여성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졌다고나 할까요. 가장 큰 이유는 먼발치에 반짝반짝 빛나는 무대 위에서 연주되던 음악이 손에 잡힐 만큼 가까운 곳에서 연주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 콘서트에서는 활을 움직이기 전 연주자들의 짧은 숨이, 호흡을 맞추려 교환하던 눈빛이, 뒤 벽에 그려지던 그림자까지 모두 음악이 되었습니다.
드보르작이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지었다는 Poco Adagio의 처음 느낌은, 따뜻함이었어요.
슬픔보다 그 따뜻함이 먼저 느껴지더군요. 그가 그 느낌을 얼마나 그리워하며 곡을 작곡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슬픔. 슬픔이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고통의 부산물인 슬픔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드보르작이 느끼던 그리움을 나도 느낄 수 있었고 곡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슬픔이 나에게도 온다면 내 슬픔도 그렇게 아름답기를 바랐습니다.
폴 쉔필드의 곡은 왠지 모르게 나에게 짝사랑의 희망과 절망, 두근거림을 느끼게 했습니다.
절망적인 짝사랑 말고, ‘희망적인’ 짝사랑의 느낌이었어요. 심장이 쿵쾅거리고, 짧은 순간에도
천당과 지옥을 몇 번이나 왕복하며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순간의 느낌.
바이올린의 현과 활이 만나는 속도가 빨라지고 첼로의 활과 그 위에 손가락이 바빠지며 피아노 건반 위의 손가락이 더 강렬한 힘을 뿌릴 때 설레는 짝사랑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환희를 경험했습니다.
클래식 음악에도 사람을 춤추고 싶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나이를 먹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어갈 수록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것이 단순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입맛이 둔감해지듯 감정이 무뎌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요.
어느 쪽이든 무미건조해진다는 것은 곧 행복을 잃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복이고 능력 아닐까요.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해질 수 있는
자격증이라고 할까요. 저에게 하우스 콘서트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희열을 느끼고 감동을 받고 눈물이 날만큼 슬프기도 했습니다. (질투도 났어요. 피아노와 첼로연주자 커플은, 꼭 그렇게 다 가질 필요는 없어요.) 또 연주의 한 음을 한 음을 소중히
담고 있는 사람이 저 뿐이 아니라는 것도 느꼈습니다. 방석을 깔고 다 같이 둘러 앉아 있는 사람들
속으로 음악 뿐 아니라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감동과 감사가 흐르더군요. 같은 것을 듣고 비슷한 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린 모두 가슴속에 뜨거운 것을 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한동안 하우스 콘서트가 선물해준 이 아름다운 소리들을 담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바쁜 일상 때문에 이 느낌이 오래가지는 않겠지요. 아직 귓전에 생생한 아름다운 소리들이 잊혀져 갈 때쯤이면 아마 저는 다시 무미건조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럴 때면 소리 뿐 아니라 연주자들의 몰두한 표정, 연주하기 전 그들이 영감을 찾는 과정 그리고 감동을 느끼는 관객들의 눈빛까지 음악이 되는 그 곳이 아마 다시 나를 느끼게 해 주겠지요.
클래식 음악, 어렸을 때부터 그건 너무 어려운 주제였어요. 그래서 뭔가 저에겐 클래식 음악이
아름답게 나이든 여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려하고 고상하며 정제된 아름다움을
가진 우아한 중년의 여성의 느낌이요. 그래서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는 항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과 고상함에 당황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오늘 하우스 콘서트에서는 클래식 음악의 그 고고함에 당황하지도, 빈틈없는 아름다움에 기가 죽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나도 나이가 들면, 따라잡을 수 없다고 느꼈던 그 고상한 중년여성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졌다고나 할까요. 가장 큰 이유는 먼발치에 반짝반짝 빛나는 무대 위에서 연주되던 음악이 손에 잡힐 만큼 가까운 곳에서 연주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 콘서트에서는 활을 움직이기 전 연주자들의 짧은 숨이, 호흡을 맞추려 교환하던 눈빛이, 뒤 벽에 그려지던 그림자까지 모두 음악이 되었습니다.
드보르작이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지었다는 Poco Adagio의 처음 느낌은, 따뜻함이었어요.
슬픔보다 그 따뜻함이 먼저 느껴지더군요. 그가 그 느낌을 얼마나 그리워하며 곡을 작곡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슬픔. 슬픔이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고통의 부산물인 슬픔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드보르작이 느끼던 그리움을 나도 느낄 수 있었고 곡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슬픔이 나에게도 온다면 내 슬픔도 그렇게 아름답기를 바랐습니다.
폴 쉔필드의 곡은 왠지 모르게 나에게 짝사랑의 희망과 절망, 두근거림을 느끼게 했습니다.
절망적인 짝사랑 말고, ‘희망적인’ 짝사랑의 느낌이었어요. 심장이 쿵쾅거리고, 짧은 순간에도
천당과 지옥을 몇 번이나 왕복하며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순간의 느낌.
바이올린의 현과 활이 만나는 속도가 빨라지고 첼로의 활과 그 위에 손가락이 바빠지며 피아노 건반 위의 손가락이 더 강렬한 힘을 뿌릴 때 설레는 짝사랑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환희를 경험했습니다.
클래식 음악에도 사람을 춤추고 싶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나이를 먹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어갈 수록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것이 단순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입맛이 둔감해지듯 감정이 무뎌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요.
어느 쪽이든 무미건조해진다는 것은 곧 행복을 잃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복이고 능력 아닐까요.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해질 수 있는
자격증이라고 할까요. 저에게 하우스 콘서트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희열을 느끼고 감동을 받고 눈물이 날만큼 슬프기도 했습니다. (질투도 났어요. 피아노와 첼로연주자 커플은, 꼭 그렇게 다 가질 필요는 없어요.) 또 연주의 한 음을 한 음을 소중히
담고 있는 사람이 저 뿐이 아니라는 것도 느꼈습니다. 방석을 깔고 다 같이 둘러 앉아 있는 사람들
속으로 음악 뿐 아니라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감동과 감사가 흐르더군요. 같은 것을 듣고 비슷한 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린 모두 가슴속에 뜨거운 것을 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한동안 하우스 콘서트가 선물해준 이 아름다운 소리들을 담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바쁜 일상 때문에 이 느낌이 오래가지는 않겠지요. 아직 귓전에 생생한 아름다운 소리들이 잊혀져 갈 때쯤이면 아마 저는 다시 무미건조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럴 때면 소리 뿐 아니라 연주자들의 몰두한 표정, 연주하기 전 그들이 영감을 찾는 과정 그리고 감동을 느끼는 관객들의 눈빛까지 음악이 되는 그 곳이 아마 다시 나를 느끼게 해 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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