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간 선물해줘서 고마워요
  • 등록일2009.10.25
  • 작성자주시완
  • 조회4149
  선선한 가을 날, 집을 나설 때 하늘에 걸려있던 그믐달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네요. 그리고 오늘 들었던 생생한 피아노의 울림도 선명하게 남아있고요.

  
  대학생활의 마지막 중간고사를 치르고 지쳐있던 나를 달래줄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시험은 어제 끝났지만, 긴장이 풀리고 의욕도 떨어져 하루종일 빈둥거렸었구요. 문득 "아, 오늘 하우스 콘서트하는 날이지!"하고 생각이 났어요.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도 고민했어요. 갈까 말까, 가면 누구랑 같이 갈까,,, 같이 한국시리즈 보기로 했던 친구 녀석이랑 같이 갈까 하다가, 동아리 모임 간다고 문자가 오기에, 조그만 골방에 처박혀 있느니 하우스 콘서트나 가자 싶더라구요. 부랴부랴 준비를 해서 집을 나섰습니다.

  
  공연장에 도착하니 오랜만에 갔는데도 스탭 분이 기억을 해주시더군요.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드디어 8시가 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성진 군이 피아노가 있는 무대로 걸어나오네요. 마의 16세라고 불리는 나이인데도, 앳되면서도 훈훈한 얼굴이 무척 인상적이군요. 마음을 가다듬은 성진 군이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자 세계가 달라졌습니다. 첫 음부터가 평소에 듣던 일상의 소리와는 달라서 공연 이전과 그 이후의 시간에 단절감이 느껴지더라구요. 클래식을 즐겨듣는 편은 아니지만, "이거 장난아니다" 싶었고, 한 음이라도 놓치기 싫어서 무지 집중을 했었어요. 그리고 지쳐있던 몸과 마음이 조금씩 채워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평소에 남한테 도움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성진 군의 피아노를 들으며 기운을 차려가는 스스로를 발견하니까 존경심마저 생기더라구요. 세상을 이토록 이롭게 하는 사람이라면, 보호 받고 존경 받을만 하단 생각,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단 마음도 먹었구요.

  
  그렇게 받았던 감동도 잠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저 가만히 앉은 채로 익숙하지 않은 클래식을 들으려니 몸이 배배 꼬이기 시작하더군요.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구부정하게도 앉았다가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가 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펴니까 뚝! 하고 뼈 맞춰지는 소리가 나면서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이 음악의 힘인가 싶기도 하구요. 바른 자세로 앉고나서, "한 음이라도 더 열심히 들어야해" 하는 욕심도 버리고 나니까 그제서야 피아노의 울림이 더 잘 들리더라구요. 욕조에 따뜻한 물 받아놓고 거품 목욕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즐겼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음악을 듣는 것 보다 음의 흐름에 맞춰 몸을 살짝 살짝 움직이면서 연주자와 호흡을 맞추니까 더 감동적이더군요. 위기의 순간이 지나간 이후엔 존경심이니 뭐니하는 이성적인 생각은 하나도 안 들고 그저 즐겁더랬습니다. 조곤조곤 연주하는 듯 하다가 어느새 힘차게 쳐서 놀라기도 하고, 빠른 손놀림에 감탄하기도 하다보니 시간은 휙휙 지나갔구요. 땀까지 흘려가면서 앵콜을 3곡이나 들려준 성진 군의 인사를 끝으로 공연은 마무리되었습니다.

  

  공연 끝나고서 먹었던 와인과 치즈도, 건물 옥상에서 바라보던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도, 스탭 분과 잠시 나누었던 이야기도 기억에 남지만, 성진 군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서 말을 걸었던 것이 제일 기억에 남네요. 어떻게든 고마움을 전하고는 싶었는데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전한 말은 "좋은 시간 선물해줘서 고마워요 ^^;;"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머물지 않고 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지네요. 망설임 끝에 하우스 콘서트 가야겠단 선택도 탁월했구요. 좋은 연주 들려준 성진군, 좋은 공연 기획해주신 창수님과 스탭 여러분, 그리고 좋은 분위기로 음악을 감상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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