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르크 데무스 공연 관람기 - 눈부신 노년, 눈부신 브람스
  • 등록일2008.11.02
  • 작성자이지원
  • 조회4307
하우스콘서트는 언제나 예측불허다.
불과 공연 이틀 전에 일정이 잡혔고, 토요일이어서
관객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많은 관객이 들었다.
또한 연주자가 1970년대를 풍미하던 옛 사람이어서
나이 지긋한 중년층이 주로 찾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관객의 연령층은 젊은 2,30대가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놀랐다.
그리고 서양고전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젊은 층이 많다는 사실에 기분이 무척 좋았다.

유리문 사이로 연습에 여념이 없는 80세 노령의 피아니스트 외르크 데무스의 모습이 보인다.
워낙 고령이어서 우려 반 기대 반이다.
노령이어서 연주의 기교적인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감과
오랜 연륜이 빚어 낼 음악세계는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교차한다.
주인장 박창수씨는 오늘도 그저 수줍고 말씀이 적다.
어찌하여 별안간 공연일정이 잡혔는지 궁금증을 풀어 줄 만도 하건만 별 이야기가 없다.
다만 연주 중 녹음과 사진 촬영을 절대 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관객들도 스스로 핸드폰을 끄는 등 그저 조심 조심하는 분위기다.

공연예정시간을 10분 정도 지나 드디어 연주자가 유리문을 열고 나와 인사를 했다.
짧았지만 우뢰와 같은 큰 박수가 터졌다. 무척 인상적이었다.
관객들의 음악적 수준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이 느낌은 그대로 적중했다.
청중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몰입하여 음표 하나 하나에 반응했다.
그리고 브라보, 앙코르를 연호하며 열광했다. 기립박수도 쏟아졌다.
연주자도 세 곡의 앙코르로 화답하였다.
이 날의 관객은 또 하나의 훌륭한 연주자였다.

자리에 앉자 마자 연주자는 먼지라도 털 듯 가볍게 건반을 눌렀다.
바흐의 프랑스 조곡 5번의 첫 곡 알르망드가 울려 퍼졌다.
찌르르 전율이 엄습해 왔다.
따뜻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호로비츠처럼 풍성한 벨 칸토는 아니다.
하지만 꾸밈이 없는, 소박하고 담백한 벨 칸토다.
어느새 노 거장은 공연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사라반드로 접어 든다.
80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생동감이 분출한다.
대단한 관록이다. 느린 루르가 인상적이다.

첫 곡이 끝났다. 큰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연주자가 다소 놀란 눈치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 궁금했던 모차르트의 환상곡 K396이 연주되었다.
스케일도 크고 고전파보다는 낭만파에 가까운 느낌이어서
쇼팽의 선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쇼팽이 모차르트를 좋아한 사실과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다.
노령에서 오는 약간의 미스터치가 있었고 때로는 힘이 달리는 듯한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다소 두리뭉실한 듯하여 명확성을 요구하는 모차르트에는 썩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균형을 잘 유지하는 등 관록을 보였다.
음반을 구해 다시 들어 보아야겠다.

이제 노령이 가장 걱정되는 베토벤이다.
1악장에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손가락이 엉긴다. 속도를 충분히 따라 가지 못한다.
미스터치도 자주 보인다. 힘도 달리는 듯하다.
명암감도 떨어 지는 듯하다. 예리한 맛도 부족한 듯하다.
불안하다.
그래도 백전노장이다.
전체적인 균형의 끈은 잡고 있다.
드디어 1악장 후반부에서 안정을 찾는다. 느린 피아니시모 부분이 깊다.
이어 자유자재로 건반을 다루며 활화산처럼 폭발한다.
2악장은 어느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
3악장은 아주 깔끔하다.
어느새 아주 편안해졌다.

서양음악 최고의 거장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전반부 연주가 끝났다.
후반부는 쇼팽, 브람스다.
그러고 보니 작곡가가 시대순이다.
바로크에서 고전파, 낭만파, 후기고전파 순이다.
그리고 쇼팽을 제외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 음악가들이다.

쇼팽의 야상곡 두 곡과 즉흥곡 한 곡, 그리고 유명한 즉흥환상곡이 연주되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다소 즉흥적이었다.
오랜 연륜에서 오는 소박한 무위자연의 경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제 마지막 브람스 곡이다.
먼저 간주곡 1번이 연주되었다.
비로서 기대가 실현되었다.
밝고 따뜻한 브람스다. 무겁지 않아서 눈부시다.
팡파르처럼 울려 퍼진다. 이렇게 긍정적일 수가 없다.
만물을 예찬하는 듯하다.
오늘 공연의 백미였다.
그러고 보니 흰색과 갈색이 섞인 머리카락에 흰 눈썹,
갈색 계통의 양복 상하의, 넥타이, 구두에
등을 구부정하게 숙이고 피아노 연주에 몰입한 연주자의 모습은
브람스의 재래처럼 느껴졌다.

간주곡 2번은 환상으로 이끈다.
간주곡 3번은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호소한다.

마지막 광시곡은 웅장하고 격정적이면서도 절제와 균형감각을 갖춘 명연이었다.

큰 박수와 환호, 기립박수가 있었다.
쇼팽의 곡, 슈베르트의 즉흥곡, 그리고 연주자의 자작곡, 앙코르 3곡이 이어졌다.

오늘 연주의 감동을 두고두고 담아 두고 싶어선가
수 많은 관중들이 연주자와 함께 사진을 연신 찍고 또 찍고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 밤,
연주자와 청중이 하나가 되어
음악의 흥취가 넘치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하우스콘서트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음악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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