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기] 박창수 프리 뮤직 관람기
  • 등록일2008.04.20
  • 작성자게으른사색가
  • 조회4658
[박창수 프리 뮤직 관람기]

아침이 되어서야 팸플릿을 읽었다. 프리 뮤직... 내겐 생소하기 짝이 없는 분야였다. 호기심 보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가슴을 채웠다. 낯 선 것은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영화에 대한 짧은 소개 후 스크린의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백의 무성 영화는 따분하기만 했다. 반세기 전 필름답게 화면은 거칠었고 내용은 조악했다. 볼거리도 메시지도 없었다. 배우들과 그들의 연기는 글자 그대로 악몽이었다. 그 모두를 깨닫기까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피아노가 작은 소리를 띄엄띄엄 내고 있었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음들은 내 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내 안에 들어오긴 했지만 내 안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까웠다. 템포가 빨라지고 리듬이 강렬해져도 마찬가지였다.

15분. 1막이 끝나기까지 대략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진지함으로 가득한 소리들이 단순하고 코믹한 장면들에 계속해서 오버랩핑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 사이의 불일치는 나를 지독한 피로 속으로 몰고 갔다. 나의 인내심도 나의 긴장감도 한계에 도달했다. 막연했던 두려움이 점차 분명한 현실로 되었다.

피아노는 여러 소리를 내었다. 줄이 긁히는 소리, 페달에 눌려 끙끙거리는 소리, 이물질을 뱉어내려는 듯 한 소리, 침묵으로 고함치는 소리... 피아노는 처음부터 화면을 설명하거나 치장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기승전결 따위의 줄거리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단지 청중을 향해 끝없이 소리치고만 있었다.

4막. 영화가 신파조의 결말에로 다가가고 있을 무렵, 피아노는 폭풍 소리를 내었다. 천 개의 젊은 심장들이 퍽퍽 터지는 소리 같았다. 그렇게 제 몸을 남김없이 부수고 난 후 피아노는 길고 깊은 숨을 쉬었다. 낮고 맑은 떨림들이 서로에게 몸을 의지한 체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속의 인물들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언어였지만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평면의 얼굴들에 높낮이가 생기고, 흑백의 옷들에 붉은 빛이 들었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음악이 끝나자 비로소 영화가 끝났다.

불확정성의 음악이라는 프리 뮤직... 연주와 작곡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프리 뮤직... 용기와 열정 없이는 결코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인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머리 속에 두 단어가 맴돌았다. ‘정말 쇼킹하구먼!’ ‘이젠 나도 늙었구먼!’  진심이었다. 나는 그 세계로 결코 들어갈 수 없을 듯했다.

2008 04 17/19
* 덕분에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관람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려니까 역시 잘 안 되는군요. 그냥 재미삼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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