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다는 것
  • 등록일2007.05.01
  • 작성자권유정
  • 조회7607
오랫동안 만났던지라 헤어지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던 사람이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안녕... 이라고 한 이유가 두리뭉실하긴 했지만
사실은 서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헤어지는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이제쯤 됐겠거니… 생각하던 차에 그에게로부터 연락이 왔다.
날씨가 너무 좋으니 바람이나 쐬자는 전화에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을 접고 나가 밥을 먹은 후,
변두리 외진 유원지를 천천히 걷던 중 그가 물었다.
“저거 타지 않을래…?”
놀이기구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놀이기구라면 질색인 나에게 범퍼카를 타자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럴 리 없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은 그럼 한 번 타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고
어느 가을 오후, 사람 드문 유원지에서
우린 만난 후 처음으로 함께 놀이기구를 타게 되었다.

그리곤… 이상하게 울컥하는 마음에
그래 어디 너 한 번 죽어봐라… 정말 신나게 밟아댔다.
옆에서 쿵, 앞에서 쿵, 뒤에서 쿵쿵쿵...
서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치곤
꽤나 살벌하게 그리고 진빠지게 30분쯤 범퍼카를 타고나서
그가 집으로 바래다 주던 길... 라디오에선 쇼팽이 흘렀고
범퍼카의 충격으로 나는 한동안 몸이 욱씬거려야만 했고
그 날 이후 우린 더이상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확인하면서 아무래도 생각 좀 나겠는걸… 싶었다.
그 날 이후 쇼팽 소나타를 들을 때마다
그 묘한 욱씬거림이 기억나곤 해서 든 생각이었는데
지난 토요일은 좀 이상했다.
신기하게도 음악을 듣는 내내 기억은 희미해졌고
천천히 기억을 되살려 보아도
예전엔 잡힐거처럼 또렷하던 영상이 어느새 낡고 바래져서
그저 형태로 남아있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오히려 햇빛에 그늘진 연주자의 가는 팔과
긴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소리 사이에 갇혀있느라
아무런 잡다한 생각이 들지 않은 토요일 저녁…
4곡의 쇼팽이 끝나자
갑자기 그래... 이제 더 이상은 나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쇼팽이 내게 면죄부를 준 느낌이랄까...

차마 버릴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보고 있을 수도 없어서...
랩으로 칭칭 감아 몇 년 동안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사진액자를
몇 년만에 다시 꺼내 보았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쩌면 그는 몇 년 동안 내내 감기에 걸려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온통 알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니까...
상관없이 시간은 또 흘러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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