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 등록일2007.01.01
  • 작성자권유정
  • 조회8783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은 왠만한건 다 봐왔습니다.
한 때 그의 영화보기가 무슨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뭐 어쨌든 필이 꽂혔기 때문에 영화가 나올 때 마다
변두리 극장 한구석에서 두근두근 가슴을 졸여가며 열심히 챙겨보곤 했죠.
그 중에서도 제 마음에 가장 남았던 영화는 그 이름도 화려한 <花樣年華> 입니다.
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나날이라는 의미라지요.
하지만 花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날들은 인생에서 잠시 반짝, 아주 한순간 입니다.

올 초인가, 전화 한 통에 영문도 모르고 예술의 전당에 불려간 적이 있습니다.
친한 언니의 첫사랑, 가슴 떨리는 그 남자의 연주회가 있다고 하더군요.
권태로운 언니의 가슴을 다시 두근거리게 만든 사람...
누구지... 라는 생각에 팜플렛을 넘기다보니... 저도 아는 사람이더군요.

꽤 오래 전 "이번 시향 연주회는 꼭 봐야돼"
선배손에 어거지로 끌려간 곳에서 그의 연주를 들은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여러 콩쿨을 휩쓸다가
잠시 한국에 들어온 그가 그 날 연주한 곡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어느 순간, 윤기있고 탄력있는 그의 소리에 반 쯤 넋이 나가고 말았죠.
이 말만 꺼내면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은 피식거리며 웃지만
지금껏 제가 들은 최고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오이스트라흐도 하이페츠도 아닌
어느 봄 날, 허름한 시민회관에서 들었던 그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입니다.
그 날 정규 레파토리가 끝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박수에
고개 한 번 까딱이고는 들려준 앵콜곡이 한 5곡 정도?
그래 내 들려주지...하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로
크라이슬러의 소품들을 들려주던 그 남자...
그 후로도 꽤 오래동안 기억속에 남아 있었지만
이상하게 인연이 잘 닿지 않았더랬습니다.
그러던 그를 바로 눈 앞에서 보게 된 것이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그의 머리는 생각보다 많이 벗겨져 있었고
그의 몸엔 생각보다 많이 지방들이 붙어있었고
그의 소리는 생각보다 아주 많이 탁해져 있었거든요.
물론 그의 이름앞에 수식하는 각종 타이틀은 전보다 더 많이 붙어있었지만,
그 어느 봄밤에 보여줬던 자신만만한 태도와 당당한 눈빛,
힘이 넘치던 보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다 양순해진 눈빛으로 아주 무난하게 조금은 권태롭게 악보를 따라가고 있었고
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던 옆자리의 언니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 했습니다.
저 사람의 화양연화는 그 때 그 봄이었나보다...
어느새 빛을 잃어버린 그 연주자는
아마도 그렇게 제 기억에 씁쓸하게 남아버릴듯 합니다.

누군가의 화양연화를 보는건 일종의 행운입니다.
배우든, 연주자든, 성악가든 운동선수든
물이 오른 그들의 화양연화는 팬의 입장에선 절대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죠.
그 날 밤은 참 좋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그야말로 끼.여.서. 딱딱한 마루바닥에 발저리게 앉아 있었지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만큼 연주도 하우스 콘서트 분위기도 남달랐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제가 갈라 콘서트에서 본 그 반짝거리는 모습들이 연주자들의 화양연화일까요...
아님 많은 사랑과 관심으로 출렁이던 그 따뜻한 풍경들이 하콘의 화양연화일까요...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시간이 지나기기전엔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라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제가 본 그 분들의 모습이, 하콘의 모습이 화양연화가 아니기를
부디 꽃이 피기 전까진 아직 좀 더 많은 시간이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마치 내 스스로, 나의 화양연화는 아직 멀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거처럼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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