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9회 하우스콘서트 - 박창수(Piano) 공연의 '게으른 사색가' 님의 후기 입니다.
  • 등록일2017.03.16
  • 작성자하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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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사색가님이 공연 일정란에 멋진 후기를 남겨주셔서 게시판으로 옮겨옵니다. 

(원문 : 
http://thehouseconcert.com/house_concert/schedule_view.html?no=882&page=3&search_txt=&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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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




그를 처음 만난 건 연희동에서였다. 좁은 공간, 딱딱한 바닥, 한 시간 내내 나를 윽박지르는 불협화음들! 그날 이후 나는 몇 달 동안 피아노를 듣지 못했다. 첫 만남의 충격은 그렇게 강렬했다. 



그 후 몇 번의 작은 연주를 듣기는 했어도 그의 피아노는 언제나 낯설고 불편했다. 그의 책을 읽어보아도, 나는 그의 음악 세계로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그의 CD가 발표되었다. ‘Infinite Finitude’, 그는 자신의 음악을 그렇게 이해하고 그렇게 표현했다. ‘무한한 유한’ 또는 ‘유한자 안의 무한’, 대략 그렇게 옮겨질 수 있는 말이었다. 그것은 지난 수 천 수 백 년 동안 서양의 종교, 철학, 예술이 고민한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기뻤다. 드디어 그의 음악 세계로 다가갈 입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한과 무한, 그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음악가는 신의 목소리를 지상에 옮기는 사람들이야”(1)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좋은 시절에 산 사람들이었다. 지상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이 신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의 부름도, 신의 축복도, 신의 위로도 기대할 수 없는 지금, 유한한 인간에게 자신의 무한성을 부여했던 그 신이 사라진 지금, 무한은 인간에게 자신의 것이면서도 자신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힘겨운 “저주받은 자유”(2) 같은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자신 안에 무한과 유한을, 영원함과 죽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허락된 삶이란 어떤 삶일까? 무한과 유한이 모두 인간의 본성인 한, 인간은 그 모두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터. 무한에 접근하기 위해 자신의 유한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하다는, 교과서적인 대답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면 정녕 인간의 삶이란 스스로를 끝없이 저주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이란 말인가? 



이른 봄날 저녁, 자신의 분신인 피아노를 한 없이 학대하는 그에게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격렬히 몰아대는 그에게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고통과 절망,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외로움이 얼핏 눈에 보이는 듯했다. 자신을 무한에로 확장하는 운명을 지닌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넓이와 깊이가 어렴픗이 느껴지는 듯했다. 자신의 존재를 모두 파괴함으로써 타인의 삶을 거짓에서 끌어내는 사람, 그런 구도자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내 심장은 부끄러움에 계속 쿵쾅거렸다. 



天外天, 하늘 밖의 하늘. 머리 위의 하늘에도 끝이 있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들, 그들이 보았던 하늘 밖의 하늘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영원을 보았을까? 영원을 향한 길 위에서 만난 유한한 사람들,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3)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피아노 앞의 그를 보며, “무모함 속에도 길은 있다고 생각하는”(4) 그를 보며, 어쩌면 그는 이미 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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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카핑 베토벤] 

(2) 사르트르

(3) Ennio Morricone, [Chi Mai] https://www.youtube.com/watch?v=xVB2p53klTE 

(4) 박창수, [하우스콘서트, 그 문을 열면], 2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