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무엇인가?
- 등록일2010.01.21
- 작성자문병철
- 조회3295
예술이란 무엇인가?
굉장히 거창한 질문이다. 이 질문처럼 거만하고 허세적인 질문이 있을까?
나는 왜 음악을 좋아하는 걸까? 어렸을 때, 나는 음악을 자주 들었는데,
왜 음악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흥얼거렸고,
여러 예술작품을 접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결론을 내렸다.
즐거우니까......
이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즐거우니까. 나는 그래서 음악을 오로지 흥미와
재미로만 접했다. 결국 소설이나 시도 모두 다 대리만족이이라는 결론에
완벽히 동의했다. 무언가에 꿈꾸는 즐거움을 대신해 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결론을 나 스스로 내렸던 것이다. 사실 이건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왜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을까?
이 물음을 한 적이 있다. 대중가요도 있고, 락도 있고, 재즈도 있다. 물론
국악도 있다. 그러나 가장 인기가 없는 클래식을 나는 좋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봤다. 허세로 듣는 것인가? 약간의 허세는
분명 있다. 그러나 허세로 그 지겨운 음악을 하루 20시간 내내 들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나는 클래식 음악의 악보를 보면서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대중가요는 4~5분 정도의 곡이고, 그 패턴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클래식은 패턴은 다양하기도 하고 그 방식이 소설로 따지면 발단, 전개, 절정,
결말처럼 무언가 스토리가 있다. 그 약간의 방법만 알면 클래식 음악을
사람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클래식도 알고 보면 그 시대의
대중음악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이야기도 어느 정도 동의하였다.
나는 그러고 보면 음악을 너무 무시하면서 살아왔다.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을
유희적인 목적으로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박창수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문득 예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 때문에 나는 2009년을 허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절대
허비한 것이 아니었다.
2009년 12월, 나는 예술을 영혼의 감각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리고 확신하였다.
확신, 이라고 말해서 내가 거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답이라는 것은
오로지 내 영혼만이 아는 것이다. 영혼이라는 말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나는
인간이라는 것이 단지 다른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생명만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인간은 분명 그 무언가가 있다.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어떤 동물과 식물이 예술을 창조할 것인가?
인간은 죽으면 단지 썩어서 거름이 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를 나는 영혼이라고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혼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과거 나는 예술에 대해서 그러하였다. 적어도 음악은 테크닉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전적인 테크니컬한 것이면 안 되고, 표현력이 들어가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정말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던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는 이러한
나의 생각에 전적으로 부합하였다.
리히터는 기교도 너무 훌륭하고, 그 표현력과 곡 해석도 너무 훌륭했다.
그러나 나는 희한하게도 클라라 하스킬의 해석력을 더 좋아했다.
그 무언가가 있다. 과연 그 무언가가 뭐길래 이렇게 대단한 것일까?
클라라 하스킬은 엄청난 천재였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이 제시한 3대 천재 중
한 명이 바로 클라라 하스킬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천재니까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겠구나....
왜냐면 많은 음악을 접하고 많은 악보를 외우고 있다면 적어도 머리에 든 것이
많기 때문에 더 많은 방법들이 생긴다. 수학 공부로 예를 들면,
다양한 문제를 많이 풀어볼수록 수학 점수가 높아질 여지가 많다.
여기서 나는 큰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박창수 선생님은 이러한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피아노 연습 시간보다는
어떻게 연습해야 하는 방법을 깨달아야 한다고...
나는 그 말이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테크닉이 없는 피아노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건 완벽한 고정관념이었다.
비르투오조였던 프란츠 리스트도 하루종일 연습했다고 한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역시 한번 악보를 봤는데도 암보할 정도로 엄청난 천재였는데
불구하고 하루 12시간씩 연습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미치는 것이었다.
나의 확고한 신념이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뇌는 평등하다. 이것이 나의 오래된 신념이다.
<누구나 아인슈타인처럼 천재가 될 수 있다.>
이 신념이 생긴 이유는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똑같은 패턴이며,
거기서 의지를 가지느냐 가지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다. 의지를 가지고 삶을 이어간다면 매우 훌륭한 사람이 되겠지만,
계속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만물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더더욱 나는 음악을 미친 듯이 들었다. 과거에는 즐기면서 들었다면,
2009년에는 미친 듯이 들었다. 나는 급했다. 무언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음악이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음악을 들어도 모르겠고, 어떤 것이 예술적인지도 도통 모르는 것이다.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라는 생각도 해보고, 무엇인가 표현할 때마다
테크닉적 부분에 너무 집착하게 되는 내 자신이 미워보였다.
그리고 나는 자괴감에 빠지면서 나의 확고한 신념을 포기한다.
음악이란, 결국 음악에 맞는 환경이어야 하며 타고난 재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선 나는 음악을 포기하였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생의 감각
김 광 섭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이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른 빛은 장마에
황야(荒野)처럼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이 시는 시인이 죽을 고비를 넘겨서 깨어났을 때,
쓴 글이라고 한다. 생의 감각 - 말 그대로 죽지 않았을 때의
감각을 표현한 시다. 죽음과 대비되는 말이 삶인데, 삶에 있어서의
삶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삶의 존재는 감각이 있으며
그 감각이 삶을 표현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시는 예술의 필요성을 알려준다. 왜 예술이 존재하는지를
처절하게 알려주는 시다. 그렇다. 삶이 있기 때문에 감각이 존재하며
감각을 깨우기 위한 행위가 예술인 것이다.
나는 결국 2009년 12월에 예술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확신하였다.
예술이라는 것은 정말 별 거 아니다.
아들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슬피 우는 것은 예술이다.
아버지가 백혈병에 걸린 딸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털어 희생하는 것은 예술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깡통을 때리면서 연주한 행위는 예술이다.
올해 풍년이 들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박수를 치는 것은 예술이다.
예수님이 말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은 예술이다.
아이들이 음악이 나오자 신나서 춤추는 것은 예술이다.
투수가 전력투구해서 결국 팀을 승리로 이끌자 너무 기뻐 흐르는 눈물은 예술이다.
예술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 다른 동식물과 달리 그 무언가가 있다면,
그 무언가를 영혼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영혼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2009년 12월 초에 나는 엉엉 울었다. 사실 미친 듯이 울었다.
이제는 음악을 포기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막 울다보니,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이 두려운 거지?
결국 두려운 것은 없었다. 그냥 남을 의식했을 때 상대적 위치에 관심이 쏠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을 의식하지 않으면 나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남을 의식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형성되어온 관념이 너무나도 나에게 뿌리박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마음껏 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우스 콘서트가 너무나도 위대한 곳이라는 것을 느꼈다.
앞서도 말했지만, 예술이란 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예술은 무언가 힘든 작업이며 고행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대강당이 생기고, 거기서 청중은 기침을 참아가면서 점잖게 앉아야
하며 그러다가 공연이 끝나면 박수를 친다.
여기서 공연을 하는 예술가들은 관객을 의식하면서 무엇인가 준비를 한다.
그러다보니 실수를 만약에 하게 된다면, 너무 긴장하다 못해 모든 것이 흐트러진다.
그러나 하우스 콘서트는 다르다.
공연자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건 아니건 정말로 예술적인 부분을 많이 따진다.
나는 2010년 신년음악회 때, 이한결씨의 피아노를 들으면서 너무나도 놀랐다.
그녀는 절대 단점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의 한계 테크닉이라든지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을 숨김없이 다 보여주었다. 바로 그것이 인간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그냥 단점을 쫙 펼쳐주고 그리고서 영혼의
감각을 톡톡 치면서 깨우는 것이었다. 정말 놀랐다. <바로 이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라라 하스킬이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던 이유는 많은 악보를 암보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영혼의 감각을 깨우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천재란 것은 암기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또한 하우스 콘서트는 장르 구분 없이 예술적인 공연이라고 생각한다면
과감하게 콘서트를 연다. 이것이야말로 하우스 콘서트가 정말 위대한 이유다.
오로지 자유로운 분위기와 자유로운 생각, 공연 때 누워서 공연을
봐도 될 것 같은 편안한 분위기는 관객과 연주자가 하나 되는 느낌을
선사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나는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우스 콘서트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되는 것....
이것은 예술이 결국 연주자와 관객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간과 인간이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우스 콘서트에 대한 나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반성하며,
하우스 콘서트가 얼마나 위대한 곳인지 요즘 나는 실감하고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하우스 콘서트를 가게 되면 알게 된다.’
굉장히 거창한 질문이다. 이 질문처럼 거만하고 허세적인 질문이 있을까?
나는 왜 음악을 좋아하는 걸까? 어렸을 때, 나는 음악을 자주 들었는데,
왜 음악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흥얼거렸고,
여러 예술작품을 접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결론을 내렸다.
즐거우니까......
이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즐거우니까. 나는 그래서 음악을 오로지 흥미와
재미로만 접했다. 결국 소설이나 시도 모두 다 대리만족이이라는 결론에
완벽히 동의했다. 무언가에 꿈꾸는 즐거움을 대신해 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결론을 나 스스로 내렸던 것이다. 사실 이건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왜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을까?
이 물음을 한 적이 있다. 대중가요도 있고, 락도 있고, 재즈도 있다. 물론
국악도 있다. 그러나 가장 인기가 없는 클래식을 나는 좋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봤다. 허세로 듣는 것인가? 약간의 허세는
분명 있다. 그러나 허세로 그 지겨운 음악을 하루 20시간 내내 들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나는 클래식 음악의 악보를 보면서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대중가요는 4~5분 정도의 곡이고, 그 패턴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클래식은 패턴은 다양하기도 하고 그 방식이 소설로 따지면 발단, 전개, 절정,
결말처럼 무언가 스토리가 있다. 그 약간의 방법만 알면 클래식 음악을
사람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클래식도 알고 보면 그 시대의
대중음악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이야기도 어느 정도 동의하였다.
나는 그러고 보면 음악을 너무 무시하면서 살아왔다.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을
유희적인 목적으로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박창수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문득 예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 때문에 나는 2009년을 허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절대
허비한 것이 아니었다.
2009년 12월, 나는 예술을 영혼의 감각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리고 확신하였다.
확신, 이라고 말해서 내가 거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답이라는 것은
오로지 내 영혼만이 아는 것이다. 영혼이라는 말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나는
인간이라는 것이 단지 다른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생명만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인간은 분명 그 무언가가 있다.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어떤 동물과 식물이 예술을 창조할 것인가?
인간은 죽으면 단지 썩어서 거름이 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를 나는 영혼이라고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혼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과거 나는 예술에 대해서 그러하였다. 적어도 음악은 테크닉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전적인 테크니컬한 것이면 안 되고, 표현력이 들어가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정말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던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는 이러한
나의 생각에 전적으로 부합하였다.
리히터는 기교도 너무 훌륭하고, 그 표현력과 곡 해석도 너무 훌륭했다.
그러나 나는 희한하게도 클라라 하스킬의 해석력을 더 좋아했다.
그 무언가가 있다. 과연 그 무언가가 뭐길래 이렇게 대단한 것일까?
클라라 하스킬은 엄청난 천재였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이 제시한 3대 천재 중
한 명이 바로 클라라 하스킬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천재니까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겠구나....
왜냐면 많은 음악을 접하고 많은 악보를 외우고 있다면 적어도 머리에 든 것이
많기 때문에 더 많은 방법들이 생긴다. 수학 공부로 예를 들면,
다양한 문제를 많이 풀어볼수록 수학 점수가 높아질 여지가 많다.
여기서 나는 큰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박창수 선생님은 이러한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피아노 연습 시간보다는
어떻게 연습해야 하는 방법을 깨달아야 한다고...
나는 그 말이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테크닉이 없는 피아노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건 완벽한 고정관념이었다.
비르투오조였던 프란츠 리스트도 하루종일 연습했다고 한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역시 한번 악보를 봤는데도 암보할 정도로 엄청난 천재였는데
불구하고 하루 12시간씩 연습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미치는 것이었다.
나의 확고한 신념이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뇌는 평등하다. 이것이 나의 오래된 신념이다.
<누구나 아인슈타인처럼 천재가 될 수 있다.>
이 신념이 생긴 이유는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똑같은 패턴이며,
거기서 의지를 가지느냐 가지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다. 의지를 가지고 삶을 이어간다면 매우 훌륭한 사람이 되겠지만,
계속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만물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더더욱 나는 음악을 미친 듯이 들었다. 과거에는 즐기면서 들었다면,
2009년에는 미친 듯이 들었다. 나는 급했다. 무언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음악이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음악을 들어도 모르겠고, 어떤 것이 예술적인지도 도통 모르는 것이다.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라는 생각도 해보고, 무엇인가 표현할 때마다
테크닉적 부분에 너무 집착하게 되는 내 자신이 미워보였다.
그리고 나는 자괴감에 빠지면서 나의 확고한 신념을 포기한다.
음악이란, 결국 음악에 맞는 환경이어야 하며 타고난 재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선 나는 음악을 포기하였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생의 감각
김 광 섭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이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른 빛은 장마에
황야(荒野)처럼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이 시는 시인이 죽을 고비를 넘겨서 깨어났을 때,
쓴 글이라고 한다. 생의 감각 - 말 그대로 죽지 않았을 때의
감각을 표현한 시다. 죽음과 대비되는 말이 삶인데, 삶에 있어서의
삶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삶의 존재는 감각이 있으며
그 감각이 삶을 표현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시는 예술의 필요성을 알려준다. 왜 예술이 존재하는지를
처절하게 알려주는 시다. 그렇다. 삶이 있기 때문에 감각이 존재하며
감각을 깨우기 위한 행위가 예술인 것이다.
나는 결국 2009년 12월에 예술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확신하였다.
예술이라는 것은 정말 별 거 아니다.
아들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슬피 우는 것은 예술이다.
아버지가 백혈병에 걸린 딸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털어 희생하는 것은 예술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깡통을 때리면서 연주한 행위는 예술이다.
올해 풍년이 들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박수를 치는 것은 예술이다.
예수님이 말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은 예술이다.
아이들이 음악이 나오자 신나서 춤추는 것은 예술이다.
투수가 전력투구해서 결국 팀을 승리로 이끌자 너무 기뻐 흐르는 눈물은 예술이다.
예술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 다른 동식물과 달리 그 무언가가 있다면,
그 무언가를 영혼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영혼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2009년 12월 초에 나는 엉엉 울었다. 사실 미친 듯이 울었다.
이제는 음악을 포기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막 울다보니,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이 두려운 거지?
결국 두려운 것은 없었다. 그냥 남을 의식했을 때 상대적 위치에 관심이 쏠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을 의식하지 않으면 나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남을 의식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형성되어온 관념이 너무나도 나에게 뿌리박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마음껏 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우스 콘서트가 너무나도 위대한 곳이라는 것을 느꼈다.
앞서도 말했지만, 예술이란 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예술은 무언가 힘든 작업이며 고행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대강당이 생기고, 거기서 청중은 기침을 참아가면서 점잖게 앉아야
하며 그러다가 공연이 끝나면 박수를 친다.
여기서 공연을 하는 예술가들은 관객을 의식하면서 무엇인가 준비를 한다.
그러다보니 실수를 만약에 하게 된다면, 너무 긴장하다 못해 모든 것이 흐트러진다.
그러나 하우스 콘서트는 다르다.
공연자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건 아니건 정말로 예술적인 부분을 많이 따진다.
나는 2010년 신년음악회 때, 이한결씨의 피아노를 들으면서 너무나도 놀랐다.
그녀는 절대 단점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의 한계 테크닉이라든지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을 숨김없이 다 보여주었다. 바로 그것이 인간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그냥 단점을 쫙 펼쳐주고 그리고서 영혼의
감각을 톡톡 치면서 깨우는 것이었다. 정말 놀랐다. <바로 이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라라 하스킬이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던 이유는 많은 악보를 암보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영혼의 감각을 깨우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천재란 것은 암기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또한 하우스 콘서트는 장르 구분 없이 예술적인 공연이라고 생각한다면
과감하게 콘서트를 연다. 이것이야말로 하우스 콘서트가 정말 위대한 이유다.
오로지 자유로운 분위기와 자유로운 생각, 공연 때 누워서 공연을
봐도 될 것 같은 편안한 분위기는 관객과 연주자가 하나 되는 느낌을
선사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나는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우스 콘서트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되는 것....
이것은 예술이 결국 연주자와 관객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간과 인간이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우스 콘서트에 대한 나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반성하며,
하우스 콘서트가 얼마나 위대한 곳인지 요즘 나는 실감하고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하우스 콘서트를 가게 되면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