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사이트] 전언, 바이올린은 내버려둘 것 - 2025 줄라이 페스티벌 OPENING '병사의 이야기'
  • 등록일2025.08.06
  • 작성자하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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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 이 여름 속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어리석은 병사처럼, 나도 대사 한 줄을 내뱉어본다. 입꼬리를 쫙 올리고 문밖을 나서는 병사 J가 말한다. “아— 이래서 내가 여길 좋아해! 진짜 재밌네.” 잠깐, 무슨 재미? 마음이 한껏 아기자기해지고, 거슬림 없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 느낌이다.


본격적으로 줄라이 페스티벌의 오프닝을 회상하기 전에, 배경음 하나를 깔아보자. 마침 어울리는 장난감 병정이 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장난감 병정 행진곡>. 이 곡이라면, 7월 1일의 ‘재미’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이유는 간단했다. 여러 방면의 ‘시작’을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7월의 첫날, 2025년 줄라이 페스티벌의 첫 무대,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서 올리는 첫 본격 게시물. 그리고 하콘의 첫 음악극. 무엇보다도 의미 있던 건, 내가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긍정할 수 있는 마음 아래에서 맞이한 첫 번째 ‘하우스콘서트’ 였다는 점이다.




2. 마룻바닥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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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이 시작된 이후, 이렇게 몇 초 만에 사람이 무더워질 수 있는 하루가 있었던가? 에어컨이 있는 곳에 잠시 머물렀다가 밖으로 나오면, 잠깐은 괜찮지 않은가? 소용없다. 해가 온전히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비로소 숨통이 트였던 것 같다. 이날의 열기는 예술가의 집 복도까지 이어졌다.


공연 시작 시간은 8시, 입장 시간은 7시 30분이니까 여유 있게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찍 근처에 도착해 예술가의 집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벽돌집 창문 너머 계단식 복도에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순간 ‘헉’하면서도, 모두가 기다려온 여름 축제였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생각해 보라. 예매는 결국 혼자 하는 일이다. 단지 마우스를 딸깍하고 버튼 하나를 눌렀을 뿐인데, 이 콘서트의 엄연한 손님이 되어 있었다. 소속감을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런 경험을 몇 번씩 함께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이러나저러나, 정말 무더운 날이었다. 7시 50분쯤 좌식 의자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 열대야를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은행 로비에 들어선 듯한 서늘함이 나를 반겼다. 입에서 절로 “아— 너무 더웠다”는 소리가 나왔으니, 얼마나 시원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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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늦게 입장한 터라, 공연 시작 전에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을 서둘러 눈에 담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봤던 풍경을 먼저 떠올려보자. 이 공간의 계단 중간쯤엔 늘 놓여 있는 칠판형 게시판이 있다. 연주자들의 소개와 주제에 맞는 그림이 분필로 정성껏 그려져 있었다. ‘여름의 제전’ 포스터와 똑같은 이미지였다. 혹시 여기는 미대생만 입사할 수 있는 곳인가? 싶을 정도로 퀄리티가 높았다.


유튜브에서만 보던 매니저님들의 실물을 힐끗거리며 한 번씩 구경하다 마룻바닥 공연장 안으로 들어선다. 한편에 주저앉아 좌식 의자가 만들어낸 그림자를 바라도 보고, 발을 뻗을 공간이 있는지도 슬쩍 살핀다. 연주자가 없는 빈 무대도 훑어본다. 음악극을 그려낼 연주자 7인이 자리할 의자들이 보인다. 더블베이스는 이미 무대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볼 때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악기다.




3. 음악극이라는 처음, <병사의 이야기>라는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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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서 나눠주신 종이 위에 나와 있는 배경 설명과 시놉시스를 눈에 담아본다. 잘 보니, 종이가 반짝인다. 일반 이면지가 아니었다. 이런 작은 요소에서부터 이 단체가 공연에 들이는 정성이 느껴진다. 노란 조명 아래 비친 하얀 모래알들이 얼마나 예뻤던가.


손으로 살짝 쓸어보며 열심히 구경하던 찰나, 박창수 선생님이 무대 한가운데로 나오셨다. 공연 진행을 위한 말씀이었지만, 나는 무대 중앙과 꽤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현장에서는 그 말씀이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유튜브로 다시 보니 ‘상큼하게’ 말씀하시려고 애쓰고 계셨더라. 몰라 뵌 내 죄다! (농담)


선생님은 줄라이 페스티벌이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맞았고 (첫해는 베토벤, 작년은 슈만, 올해는 스트라빈스키), 더하우스콘서트는 단발이 아닌 ‘흐름을 만들어가는 단체’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맞다. 작년 7월 25일, 이든 콰르텟의 슈만 현악 4중주 3번 연주를 통해 나도 이 물결에 휩쓸려 왔다. (관객으로서)


이 공간을 운영하는 분들을 단순히 ‘공연을 올리는 사람들’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훨씬 더 적절한 것 같다. 클래식을 좋아하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유명 연주자를 ♡기보다는, 내가 좋아하고 또 새로운 것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사람들 곁에 머무는 편을 택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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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음악극,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는 제1차 세계대전과 망명 생활 중 탄생한 소규모 음악극으로, 바이올린을 악마에게 팔고 부를 얻는 병사의 파우스트적 이야기를 다룬다. 7명의 연주자와 배우가 함께 이끌어가는 이 형식은 당시 공연 환경의 제약 속에서 고안된 것으로, 러시아 민속 선율에 탱고, 래그타임, 왈츠 등 다양한 장르가 결합되어 있다. 시대적 불안과 인간 내면의 균열을 그려낸 이 극은 짧지만 깊고, 무엇보다 독특하다.


사실 공연 관람 전, ‘음악극’이라는 형식이 내게 큰 흥미를 주진 않았다. 낯설기도 했고,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생소한 무대였다. 하지만 그런 편협한 선입견은 금세 깨지기 마련이다. 생각해보자. 어느 시점에 내 안에 있던 ‘염려’가 증발했던가? 병사가 파멸하고, 지휘자가 뒤돌아 손뼉을 치던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어라, 벌써 박수인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떻게 봐야 하나 생각할 틈조차 없이 이미 막이 오르고, 병사는 악마가 되고, 술게임을 하고, 공주를 구하고, 내레이터가 교훈을 말했다. 그 광경을 잠깐 구경했는데, 공연이 끝나 있었다. 연주가들과 지휘자, 연기자가 관객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는게 이상하게 느껴질만큼 몰입감을 안겨준 공연이었다.


줄라이 페스티벌의 가장 큰 장점은, 공연의 생생한 '순간'이 고스란히 기록된다는 데 있다. 언제든 다시 '공연'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분명한 매력을 지닌다. 특히 음질 면에서 현장의 감각이 잘 살아 있다. 물론, 실제 공연장에 찾아와 본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현장에서 느껴지는 채도나 분위기, 울림이 모두 담기진 않는다.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하우스콘서트 영상은 ‘음악’과 ‘연주자’에 집중한 정직한 시선으로 기록될 뿐이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와 보면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노란빛 주광색 조명 아래, 시원한 공기를 가르며 신이 난 사람들의 소곤거림이 흐르고, 분주히 관객을 안내하는 스태프들, 달뜬 숨을 내쉬는 연주자들까지, 모두가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곳에 있으면 앉은 좌석에 따라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과 순간도 다르다. 나는 무대 중앙으로부터 오른쪽 사선쯤 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기에, 검은색 바이올린이 매달려 있던 순간의 연기도 거의 1열에서 보는 것처럼 직관할 수 있었다.




4. Igor Stravinsky - L'Histoire du soldat <병사의 이야기>, K029 


이제는 음악극을 자세히 회상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우선, 개별 주인공들의 인상 깊었던 점을 먼저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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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형준 배우

병사와 악마, 그리고 내레이터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보여준 시선 처리와 고갯짓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어리석은 병사를 묘사할 때는 얼굴에 주름 하나 없이 순진무구한 안색을 띠지만, 악마로 바뀌는 순간 이마에는 주름이 겹겹이 잡히고, 허리는 구부정해지며 눈빛마저 탁해진다.


특히 병사가 악마의 집에서 편히 지내고 나온 뒤, 악마가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장면에서 조명과 고개 각도를 활용한 연출이 인상 깊었다. 병사의 대사를 말할 땐 살짝 턱을 들고 빛을 받지만, 악마가 등장할 때는 고개를 깊게 숙여 얼굴 전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노란 조명 아래서 변화하는 빛의 명암이 몰입도를 한층 끌어올려 주었다.


백윤학 지휘자

백윤학 지휘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순간이 떠오른다. 화려한 액션의 지휘로 잘 알려진 분이라, 권형준 배우와 과격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오히려 7인의 연주자들을 섬세하게 이끌어내는, 지휘자 본연의 역할에 깊이 몰입해 있었다.


그 역시 ‘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음악 속에 자신을 조용히 녹여내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다만 중간에 아주 짧게, ‘공주’ 역할로 깜짝 변모해 관객들에게 깨알 재미를 선사해 주었다.





Part 1

Marche du soldat (병사의 행진)

처음엔 투박한 '병사의 행진'을 들으면서 내가 쉽게 몰입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며 권형준 배우가 무대보다 훨씬 높은 왼편 상단 무대에 등장해 번뜩 대사를 내뱉었다. 깜짝 놀랐다. 여기 천장 근처에도 공간이 있었던가? 그 순간부터 새로움 위에 새로움이 겹쳐졌다.


잔잔하고 통통 튀는 트럼펫과 더블베이스의 반주가 내 마음을 둥, 둥 띄워내기 시작했다. 병사도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는데, 나도 1시간쯤은 그 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엉거주춤하지만, 일단 따라가는 게 손님의 미덕이겠다.


퍼커셔니스트 이원석의 리드미컬한 ‘두드림’이 끼어든다. 병사의 걸음걸이는 더블베이스가 맡고 있는 것 같았다. 둥–당–둥–당— 일곱 개의 악기마다 각기 다르게 표현되는 게 인상 깊었다. 국방색 가방을 멘 병사가 슥슥 걸어 나와 가방을 뒤적이더니, 성 요셉(도금된 메달)을 꺼내 들고는, 내레이터로 급 변신해 방금 뱉은 대사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오늘의 배우가 엄청 바쁘겠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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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 다음엔 초상화를 꺼내든다. 그러고 나서 꺼낸 바이올린을 천장에 매달린 와이어에 건다. 내 눈이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했다. 하얀색 바이올린이라니. 장난감으로도 보기 힘든 색인데, 그것이 대롱대롱 흔들린다. 그 사이, 바이올리니스트 이윤의가 병사의 연주를 대신한다. 이어서 악마가 나타나 엄청나게 두꺼운 책을 들고 바이올린 근처를 서성이기 시작한다. 냄새도 맡고, 현도 튕겨보며 구석구석 살핀다. (나도 보고 싶다)


지휘자의 두 손이 가볍게 허공을 띄우자, 악마가 대사를 뱉는다. 배우의 딕션이 또렷하고 성량도 워낙 커서, 마치 뮤지컬을 보는 것 같았다. 악마와 병사는 바이올린과 책(금고)을 맞바꾼다. 거래에 성공한 악마는 레슨을 핑계로 병사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킬 앤 하이드가 따로 없다. “3스타에 뒤지지 않는 코스요리, 샴페인, 쿠바산 시가…”라는 대사를 들었을 땐, 뮤지컬 <시카고>가 스쳤다.


Petits airs au bord du ruisseau (시냇가의 선율)

쿵쾅, 쿵쾅, 쿵쾅— 일곱 개의 악기가 뒤뚱거리며 신이 난 병사를 묘사한다. 물가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 부유하는 병사, 그를 띄우는 지휘자의 손동작은 아래에서 위로 통, 통, 통 튄다. 이후엔 바이올린 레슨을 핑계로 3일간 악마의 집에 머물렀던 병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면서 “3일이 사실 3년이었다”는 설정이 등장하고, 병사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 지휘자의 대각선 뒤에서 무릎을 꿇어 앉은 병사가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탄식한다. 관악기가 복잡한 심정을 대신 흘려보낸다.


Pastorale (목가)

여기도, 저기도 소속되지 못한 채 유영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악마는 흑색 바이올린을 들고 다시 등장하고, 병사를 몰아붙인다. 악마는 병사의 군기를 잡기라도 하듯 소리를 질러댄다. 책을 읽으며 의심쩍은 표정을 짓는 병사. 미래를 알려주는 책 덕분에 엄청난 돈을 벌게 되지만, 결국 아무도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0달러짜리 바이올린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모든 걸 다 누리고 난 뒤에야) 죄 없는 책 앞에 무릎 꿇고, 고독한 자신을 연민한다. 그때 누군가 보따리를 들고 나타나 메달, 초상화, 작은 바이올린을 보여준다. 병사는 흑색 바이올린을 손에 쥐고, 갑자기 현을 마구 뜯고, 짓밟고, 책을 찢어버린다. (이 공연이 일회성임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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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Reprise: Petits airs au bord du ruisseau, Marche du soldat (시냇가의 선율, 병사의 행진)

배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무대는 Part 1의 마지막 ‘시냇가의 선율’로 채워진다. 이어지는 Part 2, 다시 내레이터는 병사의 행진을 묘사한다. 고향의 반대편으로 향하는 발걸음, 여인숙에서 듣게 된 공주의 병 소식, 누군가를 찾는다는 공표. 이야기의 흐름이 다시 격동한다.


Marche royale (왕의 행진)

왕의 행진 장면에서는 위엄 있는 듯하면서도 약간 삐걱대는 기색이 느껴진다. 트럼펫 연주가 힘들어 보였다. 병사는 흑색 바이올린을 무대 오른쪽 끝에 조심스레 걸어둔다. 왕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병사, 사랑받고 싶어 스스로 길을 나서는 병사다.


악마는 다시 나타나, 자신이 음악으로 공주를 낫게 하겠다며 병사를 자극한다. 그때 누군가 등장해 병사와 악마의 도박을 부추긴다. 악마는 계속해서 카드 게임에서 이기지만, 술게임에서는 대차게 진다. 결국 병사가 바이올린을 되찾는다.


Petit concert (작은 음악회)

작은 음악회가 시작된다. 병사는 무대 위에서 “자신 있습니다!”를 외친다. 어리숙한 모습이다. 이제 치료할 바이올린도, 연주할 마음도 다 갖췄다. 공주만 남았다. 트롬본의 주인혜 연주자가 노란색 티아라를 꺼내 지휘자에게 건넨다.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왕관을 얹은 지휘자. 통솔자가 머리 위에 무언갈 얹은 이후부터 7명의 연주자들이 묘하게 아래쪽만 바라보기 시작해 웃겼다.


Trois danses: Tango - Valse - Ragtime (3개의 춤곡: 탱고 - 왈츠 - 래그타임)

3개의 춤곡이 시작된다. 활을 쥐고, 떼고, 춤을 추기 시작하는 바이올린. 아— 묘사하기 힘든 소리들이다. 음악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스트라빈스키 특유의 감각이 펼쳐진다. 체계가 있는 듯 없는 듯, 북을 두드리는 리듬 자체가 묘하게 어긋나면서도 귀를 사로잡는다.


Danse du diable (악마의 춤), Petit choral (작은 코랄)

춤이 끝난 뒤 공주와 병사는 얼싸안는다. (진짜 포옹했다) 악마는 바이올린을 빼앗긴 채 애원하지만, 병사는 양보하지 않는다. 악마는 몸을 뒤틀며 춤을 추고, 기괴한 몸짓 속에 음악은 더 치밀해진다. 이쯤 되면 바이올린이 정말 바빠진다. (이런 악기를 버렸다고?)


Couplets du diable (악마의 춤), Grand choral (큰 코랄)

이 악장에서 악마는 마구 저주를 퍼붓는다. 내레이터는 이 극의 교훈을 전한다. 우리가 가진 것에 더 욕심을 부리지 말고,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될 수 없음을 알려준다. “하나의 행복은 전부가 될 수 있지만, 둘 이상을 가지려 하면 어느 것도 온전히 가질 수 없다….” (가만 보면, 내레이터가 제일 무섭다. 불시에 친절한 목소리로 등장하니까)


공주는 병사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 병사는 자신이 아주 멀리 왔음을 전하며,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지금의 영광과 과거의 행복, 둘 다 손에 쥐려는 것이다. 다시 내레이터가 경고한다. “그렇게는 다 가질 수 없다.”


Marche triomphale du diable (악마의 승리의 행진)

병사는 고향을 향해 걸어간다. 저 멀리 서 있는 공주를 향해 부르짖는다. 그때, 악마가 개선 행진곡을 연주하며 나타난다. 병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악마를 따라간다. (뭐야, 홀린 거야?) 바이올린 뒤편에 있는 이원석 연주자는 마룻바닥을 울리려는 듯 북을 힘차게 두드린다.


절대 쉽게 칠 수 없는 박자들이 쿵— 쿵— 내리쳐질 때마다, 땅바닥이 울렸다. 연주자가 자신의 밑으로 공을 툭— 던지면, 그 소리가 내 발밑에서 쿵— 위로 퍼져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는 찰나, 극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5. 쿵쾅, 쿵— 이 여름을 시작하게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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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악마가 이겼다. <병사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터라, 큰 배경 설명만 알고 공연을 감상했는데, 병사가 이렇게 순순히 악마에게 끌려가 버릴 줄은 몰랐다. 역시 인간은 신을 이길 수 없는 걸까?


배우가 한 번 더 튀어나와 우렁찬 내적 발성으로 “인간들이란 무식하구나!” 뭐 이런 식으로 외쳐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내가 몰입했기 때문에 시간이 짧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공연이 끝나고 모든 연주자가 무대 위에 올라와 인사를 건넸을 때, 지휘자께서 왕관을 한 번 더 써주시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내버려 두셔서 괜히 아쉬웠다. 다음엔 쓴 채로 빛내주셔도 좋을 것 같다. (욕심 많은 관객이다)


1일의 오프닝 공연은 정말 흥미로웠다. 예술가의 집을 나와 지하철에 앉으니, 오늘 느낀 감정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보통 클래식 공연을 보고 나면, 연주의 흐름에 깊이 몰입한 탓에, 마음속 감정을 꺼내어 글로 옮기는 일이 벅차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 음악극은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즐겨서 문제였다. 이 가벼운 둥둥 뜨는 감정을 어떻게 글로 풀어내야 할지 막막했다는 것이다. “재미있었다니까? 음악극이 이런 거구나, 처음 알았어!”로 끝내고 싶었던 마음을 간신히 붙잡았다.


요즘은 가사 없는 ‘소리’가 주인공인 무대에 익숙해졌다. 그런 무대에서는 소리를 해석하고, 상상하고, 의미를 찾아야 할 일이 많았다. 반면 이번 무대는 직관적인 스토리라인과 사람의 목소리가 주는 가벼움이 있었다. “이런 생각이에요—이런 라인이에요!” 하고 바로 전해지는 느낌 덕분에 머리가 환기되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해석이나 판단이 필요 없어서 더 좋았다.


아, 이게 진정한 ‘오프닝’일까 싶었다. 시작부터 무게를 짊어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프닝이라면, 진중하기보단 관객을 둥—둥—띄워 흥을 돋우는 쪽이 먼저일 것이다. 그날 내가 본 발자국은 몇 개였을까. 쿵쾅—쿵쾅—관악과 현악이 서로 엇갈린 타이밍으로 박자를 던지고, 그 틈 사이로 악마의 춤이 펼쳐졌다. 이런 공연을 또 언제 보게 될까.


줄라이 페스티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7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며칠 뒤 사그라질 계절, 그 사이에 피어난 제전. 이 여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6. 끝내며 — 전언, 바이올린은 내버려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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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바이올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결국 바이올린을 팔아버려서 이 모든 사달이 난 것 아닌가? 요즘 들어 현악 4중주와 바이올린 독주, 2중주 무대를 애정하고 있는 나에게 아주 딱 걸린 내용이었다. 현악기를 함부로 팔면 악마한테 잡아먹히는 거다. 다들 꼭 기억해 두시길. (농담 반, 진담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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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문 앞에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도록 놓여 있던 포스터를 집에 와서 펼쳐보았다. 사이즈가 압도적이고, 재질도 엄청 맨질맨질했다. 프로그램 설명 용지도 모래알처럼 반짝였는데, 포스터는 부드럽기까지 하다. 여긴 정말 진심이다. 그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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