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객석] 2015년 4월호 - 무대와 객석, 나이의 경계를 허물다
  • 등록일2016.06.14
  • 작성자하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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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TLIGHT

 

무대와 객석, 나이의 경계를 허물다

피아니스트 이경숙

하우스 토크 콘서트

더하우스콘서트의 431번째 손님으로 이경숙이 초대되었다.

그녀의 음악 인생 이야기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의 진수를 들어본다

 

이야기의 시작, 하우스 토크

3.4 7:30pm 예술가의 집 예술나무카페

 

2002년 7월 12일, 음악가 박창수의 연희동 자택에서 처음 시작된 더하우스콘서트.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며 13년의 시간을 달려온 더하우스콘서트 음악회의 431번째 주인공은

피아니스트 이경숙이었다.

 

박창수 반갑습니다. 교수님을 학창 시절 동네에서 가끔 뵙고 늘 흠모했는데,(웃음) 이제야 음악회에 초대하게 되었네요.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경숙 제가 연희동에 정말 오랫동안 살았는데, 연희동은 단독주택이 많아 사람들이 더하우스콘서트를 하는 집을 잘 못 찾고 우리 집에 와서 물어보는 경우도 꽤 있었어요. 대표님 집과 우리 집이 워낙 가까웠으니.

박창수 교수님과는 정말 가까운 이웃사촌이었습니다. 저도 늘 초대하고 싶었는데, 당시는 감히 말씀을 못 드렸어요.

이경숙 연희동은 해가 질 무렵이면 동네가 조용하고 고즈넉해지죠. 그런 곳에서 매주 화요일에 음악회가 열린다는 것이 늘 신기했어요. 그래서 더하우스콘서트 하는 집을 물어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묻곤 했죠. ‘아니, 그냥 주택에서 음악회를 한단 말이에요? 거기 피아노는 있어요?(웃음). 지금은 이사를 왔지만, 만약 그때 초대받았다면 집에서 한 걸음이면 갈 수 있었을 거에요.

박창수 언젠가 교수님을 초대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연락이 잘못 전달되면서 결국 무산되었지요. 그래도 다행히 지금이라도 뵙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어쨌든 저희와는 만날 운명이셨나 봐요.

이경숙 저도 그 유명한 더하우스콘서트에 초대되어 반갑고 자랑스럽네요. 나이 든 연주자를 이렇게 초대해주었으니, 좋은 연주를 들려드려야 할 텐데요. 

박창수 요즘 학교에서 학생드을 다시 가르친다고 들었는데요,

이경숙 그러잖아도 얼마 전 취직을 했어요.(웃음) 서울사이버대학의 석좌교수로 3월부터 일하게 되었는데, 학생들의 연령층이 다양해요. 젊은 친구도 있지만 사정상 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한 40~50대 중년학생도 많은데, 그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저도 배우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물론 실력은 부족한 경우가 많지만, 배우려는 열정만큼은 대단하거든요. 피아노를 칠 때 안 되는 테크닉에 대해 여러 방법을 가르쳐주면, 문제들이 해결되고 실력이 느는 걸 보면서 저도 신이 나고 보람도 느껴져요. 장학제도도 잘되어 있고 다양한 학생에게 좋은 교육의 혜택을 주기 때문에 의미도 깊고 은퇴한 제게도 봉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요. 

박창수 외국은 나이가 들수록 멋진 연주자가 많은데, 우리도 연주자들에게 다양한 무대의 기회가 많아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경숙 나이가 들면 경험이 풍부해지기에 작품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이 더 깊고 넓어지죠. 테크닉이야 젊은 시절만 못해도 예술가로서 더 풍요로워지는 부분이 분명 있어요. 문제는 우리나라는 귀국해서 젊은 시절에 연주를 하고 40~50대가 되면 연주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그때 연주를 하지 않기 때문에 60~70대가 되어 진짜 연주를 할 수 없게 되는 거에요. 그런 면에서 더하우스콘서트 같은 곳에서 중년 연주자의 무대를 다양하게 마련해주면 좋겠어요.

박창수 이번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을 연주하시는데, 혹시 지금도 연주 전에 떨리시나요?

이경숙 너무 떨려서 어제 잠을 못 잤어요.(웃음) 아주 오래전 세종문화회관에서 리카르도 샤이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협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갑자기 블랙아웃이 온 적이 있었어요. 리허설도 없이 진행된 연주에서 부담과 두려움을 갖고 피아노 앞에 앉은 것이 문제였죠. 이후 그때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연주뿐이더군요. 하지만 지금도 피아노 앞에서 떨리는 건 마찬가지예요. 특히 협연을 할 때요.(웃음)

박창수 이번에 연주하는 작품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도 유명한 ‘월광’ ‘비창’ ‘열정’이라 더욱 기대됩니다. 예전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도 하셨죠?

이경숙 다른 곡도 마찬가지지만, 베토벤을 연주하고 만족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자꾸 다시 연주하게 돼요. 하지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면서 베토벤의 어떤 작품에서는 화성 진행이나 프레이징에서 어색한 부분도 있다고 느껴져요. 그도 완벽하게 다 곡을 쓰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지더군요.

 

 

절실함이 진짜 음악을 만든다

박창수 어린 시절 음악을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이경숙 6.25전쟁 시절, 음악을 배우는 것은 배부른 이야기였죠. 그래도 우리 어머니가 성악을 하셨기에 교육열이 강하셨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해주셨고, 신제덕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부산으로 피란 와서 만난 친구들이 지금은 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네요. 백건우, 한동일, 신수정… 모두에게 음악이 절실하던 시절이었어요. 건우 아버님이 건우가 갖고 있지 않은 악보가 있으면 그것을 다른 친구들에게 빌려가 다시 베껴서 악보를 만들어주신 게 생각나네요. 모두들 참 힘들게 공부하던 때였죠. 

박창수 그 시절, 미국 커티스 음악원에 유학을 가셨는데요,

이경숙 어머니의 열정으로 가게 되었죠. 처음에 피아노를 배우러 미국에 갔을 때 교수님이 제 연주를 들으시고 기본 테크닉이 균형 잡히지 않았다고 받아주지 않은 것이 생각나네요. 어머니가 그래도 좀 받아달라고 간절히 편지도 쓰시고 하셨어요. 그렇게 어렵게 음악을 해서인지 우리 시대에 공부한 음악가들은 나이가 들수록 새롭게 알아내고 찾아가는 기쁨을 더 누리고 살 수 있었지요. 부족함을 느끼고 계속 노력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죠. 어떤 분야든 배움에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기쁨이 필요한 것 같아요.

박창수 이 세상에는 음악인이 있고, 음악가가 있고, 예술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대에서 연주하는 교수님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후배들이 모델 삼을 만한 연륜 있는 예술가가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이경숙 저도 반짝 스타보다는 음악을 더 깊이 바라보고 한결같은 연주자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꼭 큰 홀이 아니어도 청중과  같이 호흡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우리 나이든 연주자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니까요.

박창수 교수님은 언제나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데요,

이경숙 예술 하는 사람들이 성격이 예민한 경우가 많아요. 자기 색깔이 있어야 자기만의 연주도 하는 거니까. 하지만 제 주위 친구들만 봐도 전쟁을 겪으며 어렵게 음악을 공부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죠. 저만 해도 어머니 혼자 딸을 키우시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인생의 여러 어려움도 많이 겼었고요. 그런데도 남들이 저를 보면 참 명랑하다고 해요. 그건 타고난 성격이겠지만, 저는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이것도 다 과정이고 지나갈 거라는 생각을 늘 했어요.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질 밝은 미래를 생각한 것 같아요. 슬픔과 기쁨이 함께 있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인생이 늘 행복할 순 없겠지만, 마음 한구석에 늘 따뜻한 봄날을 그리곤 했어요.

박창수 여러 연주자분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려운 시간이 좋은 음악, 좋은 연주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우스토크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이어질 다음 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연주 무대도 기다려지네요.

이경숙 집에 돌아가면 바로 또 열심히 연습해야겠네요. 피아노는 제게 부족함을 깨닫게 해주면서도 살아가게 하는 이유죠. 속을 아는 가장 친한 친구처럼 늘 내 곁을 지켜줄 거라 믿어요. 그날 함께할 청중, 그리고 베토벤과의 만남을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연주의 시작, 더하우스콘서트

3.9 8:00pm 예술가의 집 3층

‘열정의 카리스마’ 이경숙. 아무리 생각해도 이경숙을 표현할 때 ‘열정’이라는 말은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다른 단어는 수식어일 뿐 ‘열정’은 이경숙의 또 다른 이름이다. 소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그녀가 5일 후 본격적인 더하우스콘서트 무대의 피아노 앞에 앉았다. 객석과 청중의 경계가 허물어진 더하우스콘서트에서 깊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베토벤의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달빛의 단아한 월광과 차가운 비창, 뜨거운 열정의 선율이 가슴속으로 아련히 스며든다. 그녀의 연주는 결이 곱다. 기쁨과 슬픔이 고운 결이 되어 순하게 다가온다. 

“가끔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노래를 기억하며 연주를 해요. 그 기억 속에 제가 그리워하는 것이 다 들어 있거든요. 베토벤을 많이 연주했지만 베토벤이 말하는 건 언제나 운명에 대한 도전이었어요. 베토벤을 연주할 때면 그의 아픔이 제 상처와 닮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어차피 인생은 기쁨과 이별이 가득한 것. 마음에 꽃을 품고, 손에는 운명에 맞설 칼을 드는 것. 그녀의 음악은 그녀의 인생을 닮았다. 그리고 그 음악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때로는 먹먹한 가슴을 움켜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글 국지연 기자(ji@gaeksuk.com) 사진 심규태

 

- 이경숙은 서울예고 재학 중 장학생으로 도미하여 커티스 음악원에서 미에치스와프 호르쇼프스키와 루돌프 제르킨을 사사했고 1967년 제네바 콩쿠르에서 입상한 것을 비롯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협주곡 오디션에서 우승함으로써 국제적인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와 협주곡 전곡,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했다.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음악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연세대 음대 학장을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 음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서울사이버대학교 피아노과 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