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아르코 vol.224] 2012년 12월 17일- ARKO ARTIST
- 등록일2013.01.03
- 작성자류혜정
- 조회1821
황병기, 그를 둘러싼 미스터리 10가지에 대해 입을 열다
조선일보 문화부 김성현 기자
거실이나 스튜디오 같은 일상 공간도 얼마든지 음악회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10년 전 피아니스트 박창수 씨가 시작한 ‘더 하우스 콘서트’(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ARKO)가 음악 분야 민간공연장 지원사업으로 현재까지 5년간 지원하고 있음). 지난 11월 29일 열린 327번째 콘서트에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76) 씨가 이야기 손님으로 찾아왔다. 그는 지난 11월 20~21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2012 ARKO 한국창작음악제의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초등학생과 주부, 국악 전공생까지 관객 100여 명 앞에서 황씨는 2시간 10분에 걸쳐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황 씨 자신은 전혀 웃지 않으면서도, 정작 관객들은 웃게 하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날 그가 ‘황병기를 둘러싼 미스터리 10가지’에 대해 속 시원히 털어놓았다.
1. 어릴 적엔 낙제생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광복을 맞아 ‘기역니은’을 처음부터 배웠다. 하지만 공책에 글씨를 쓰는 것이 쓴 약 먹기보다 싫었다. 집에 들어가면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을까 봐, 점심을 거르고 밖에서 놀았다. 이듬해 외당숙을 만나면서 최면에 걸린 듯 나도 모르게 공부의 재미에 빠졌다.”
2. 반장에게 자존심 상해 가야금 배웠다.
“중학교 입학하고 처음 들어간 곳이 유도부였다. 지금은 지푸라기처럼 보이지만 그때는 힘깨나 썼다. 중3 때 모범생 반장이 가야금을 배우자고 권했다. 나는 가야금이 삼국시대 역사책에만 나오는 악기인 줄 알았는데, 친구 녀석은 이미 가야금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곧바로 하굣길에 ‘고전 무용 연구소’에 찾아갔다. 그때 가야금 소리에서 ‘방황하지 마라. 여기 우리 것이 있다’는 조상의 계시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3. 그의 롤 모델은 아인슈타인이었다?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게 예술이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딱 세 번 영화 구경을 했는데, 모두 시시하다고 중간에 나오셨다. 평생 흥얼거리거나 휘파람 부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며느리(소설가 한말숙)의 소설도 안 읽으셨고, 내 음반도 듣지 않으셨다. 부모님은 공부에 지장 있다며 가야금 하는 걸 반대했다. 논리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아인슈타인의 바이올린 실력이 뛰어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인슈타인이 과학자로 성장하는데 바이올린은 방해가 아니라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4. 그의 스승은 술꾼이었다?
“심상건 명인에게 잠시 산조를 공부한 적이 있다. 좋은 가락을 듣고 싶은 제자들은 스승에게 술을 사 들고 간 뒤, 창문 밖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고 한다. 술을 드시고 기분이 좋아서 즉흥적으로 연주할 때 좋은 가락이 나왔고, 제자들은 그 가락을 엿들으면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선생은 문화부 장관에게 초대받은 자리에서도 진탕 술을 드시고 연주한 뒤 ‘오늘 술주정했다’고 하면서 껄껄 웃었다고 한다.”
5. 교복 입고 짚신 끌고 대학 생활했다?
“아무리 가난한 서울대 학생도 고교 교복을 입지는 않았다. 멀쩡한 교복인데 왜 대학생이라고 안 입는지 오히려 이상했다. 궁둥이 부분이 떨어져서, 헝겊을 하트 모양으로 잘라서 꿰매서 입고 다녔다. 그래서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없었나 보다.(웃음)”
6. 국악과 초기엔 성악 전공생이 입학했다.
“1959년 서울대 국악과가 생겼을 때 현제명 당시 음대 학장의 부름으로 강사가 됐다. 하지만 지원자가 적어서 폐과 위기였다. 서양 음악과에 지원한 학생 가운데 2지망으로 국악과 신청을 받았다. 대부분 국악과에 들어온 뒤 처음 가야금을 본 학생들이었지만, 몇몇 학생은 엄청나게 노력했다. 이들이 내 첫 제자들이다.”
7. 싸이보다 일찍 미국 진출했다
“1965년 29세 때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초청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당시 첫 음반을 녹음했는데, 가난한 시절이라 장구 반주자도 못 데려갔다. 먼저 가야금을 녹음한 뒤, 이어폰으로 내 연주를 들으면서 장구를 쳤다. 힘이 좋을 때라 연습도 안 하고 한 번에 녹음을 끝냈다. 나중에 음반을 보내줘서 중앙우체국으로 찾으러 가니 사치품이라서 관세를 내라고 했다. 세금 내고 내 음반을 찾아왔다.”
8. 그는 실패한 사업가였다?
“1960년대 악기 제작자의 권유로 색소폰의 마우스피스 제작에 손댄 적이 있다. 미국 갈 일이 있어서 재즈 거장들에게 보여줬더니 말로는 ‘좋다’고 하면서도 막상 구입하지는 않더라.”
9. 그의 작품 <미궁>을 3번 이상 들으면 죽는다?
“1970년대 가야금만으로 어떤 전위 음악보다 더 전위적인 작품을 써서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야금의 전통 연주법은 쓰지 않고 첼로 활과 장구 채, 거문고의 술대로 가야금 현을 때려가며 새로운 소리를 얻었다. 30여 년 뒤 인터넷 세상이 되자 뒤늦게 <미궁>을 접한 아이들이 놀라서 ‘작곡가는 자살했다’ ‘세 번 들으면 죽는다’는 등 별의별 소문을 만들었다. 군대에서는 담력을 기른다고 새벽에 틀어준다고 한다.”
10. 교수 황병기는 커닝페이퍼를 장려했다?
“시험 잘 보려고 쓸데없는 것까지 외워야 하는데다, 모든 시험에는 반드시 커닝하는 학생이 있다. 성실한 학생들만 손해 보는 불공평을 없애기 위해 A4 종이를 4분의 1 크기로 잘라서 커닝페이퍼를 시험장에 들고 오도록 했다. 종이가 크면 공부를 안 하니까, 작게 만들어서 외울 필요가 없는 내용만 적어오게 했다.”
황병기
1936년 서울 출생.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다녔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 공부를 했다. 결혼도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우다 만난 소설가 한말숙 씨와 했다. 1962년 첫 가야금 창작곡 <숲>으로 창작 국악에 불을 지폈다. 1975년 무용가 홍신자와 발표한 <미궁>으로 한국음악계에 충격을 던졌다. 이화여대 교수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냈고, 현재 ARKO가 주최하는 ARKO 한국창작음악제 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창수의 The House Concert
2002년 음악가 박창수의 집에서 시작된 국내 최초의 살롱 음악회로 클래식, 대중음악, 국악 등 다양한 음악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지난 10년간 다양한 예술장르가 공존하고 실험정신이 살아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올해 7월 ‘하우스 콘서트 대한민국 공연장 습격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일주일간 100개의 공연을 개최하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전국 공연장에 하우스콘서트 형식의 공연을 올리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2008년부터 ARKO의 음악 분야 예술전용공간지원 사업으로 문화예술진흥기금을 지원받고 있다.
조선일보 문화부 김성현 기자
거실이나 스튜디오 같은 일상 공간도 얼마든지 음악회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10년 전 피아니스트 박창수 씨가 시작한 ‘더 하우스 콘서트’(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ARKO)가 음악 분야 민간공연장 지원사업으로 현재까지 5년간 지원하고 있음). 지난 11월 29일 열린 327번째 콘서트에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76) 씨가 이야기 손님으로 찾아왔다. 그는 지난 11월 20~21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2012 ARKO 한국창작음악제의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초등학생과 주부, 국악 전공생까지 관객 100여 명 앞에서 황씨는 2시간 10분에 걸쳐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황 씨 자신은 전혀 웃지 않으면서도, 정작 관객들은 웃게 하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날 그가 ‘황병기를 둘러싼 미스터리 10가지’에 대해 속 시원히 털어놓았다.
1. 어릴 적엔 낙제생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광복을 맞아 ‘기역니은’을 처음부터 배웠다. 하지만 공책에 글씨를 쓰는 것이 쓴 약 먹기보다 싫었다. 집에 들어가면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을까 봐, 점심을 거르고 밖에서 놀았다. 이듬해 외당숙을 만나면서 최면에 걸린 듯 나도 모르게 공부의 재미에 빠졌다.”
2. 반장에게 자존심 상해 가야금 배웠다.
“중학교 입학하고 처음 들어간 곳이 유도부였다. 지금은 지푸라기처럼 보이지만 그때는 힘깨나 썼다. 중3 때 모범생 반장이 가야금을 배우자고 권했다. 나는 가야금이 삼국시대 역사책에만 나오는 악기인 줄 알았는데, 친구 녀석은 이미 가야금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곧바로 하굣길에 ‘고전 무용 연구소’에 찾아갔다. 그때 가야금 소리에서 ‘방황하지 마라. 여기 우리 것이 있다’는 조상의 계시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3. 그의 롤 모델은 아인슈타인이었다?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게 예술이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딱 세 번 영화 구경을 했는데, 모두 시시하다고 중간에 나오셨다. 평생 흥얼거리거나 휘파람 부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며느리(소설가 한말숙)의 소설도 안 읽으셨고, 내 음반도 듣지 않으셨다. 부모님은 공부에 지장 있다며 가야금 하는 걸 반대했다. 논리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아인슈타인의 바이올린 실력이 뛰어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인슈타인이 과학자로 성장하는데 바이올린은 방해가 아니라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4. 그의 스승은 술꾼이었다?
“심상건 명인에게 잠시 산조를 공부한 적이 있다. 좋은 가락을 듣고 싶은 제자들은 스승에게 술을 사 들고 간 뒤, 창문 밖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고 한다. 술을 드시고 기분이 좋아서 즉흥적으로 연주할 때 좋은 가락이 나왔고, 제자들은 그 가락을 엿들으면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선생은 문화부 장관에게 초대받은 자리에서도 진탕 술을 드시고 연주한 뒤 ‘오늘 술주정했다’고 하면서 껄껄 웃었다고 한다.”
5. 교복 입고 짚신 끌고 대학 생활했다?
“아무리 가난한 서울대 학생도 고교 교복을 입지는 않았다. 멀쩡한 교복인데 왜 대학생이라고 안 입는지 오히려 이상했다. 궁둥이 부분이 떨어져서, 헝겊을 하트 모양으로 잘라서 꿰매서 입고 다녔다. 그래서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없었나 보다.(웃음)”
6. 국악과 초기엔 성악 전공생이 입학했다.
“1959년 서울대 국악과가 생겼을 때 현제명 당시 음대 학장의 부름으로 강사가 됐다. 하지만 지원자가 적어서 폐과 위기였다. 서양 음악과에 지원한 학생 가운데 2지망으로 국악과 신청을 받았다. 대부분 국악과에 들어온 뒤 처음 가야금을 본 학생들이었지만, 몇몇 학생은 엄청나게 노력했다. 이들이 내 첫 제자들이다.”
7. 싸이보다 일찍 미국 진출했다
“1965년 29세 때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초청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당시 첫 음반을 녹음했는데, 가난한 시절이라 장구 반주자도 못 데려갔다. 먼저 가야금을 녹음한 뒤, 이어폰으로 내 연주를 들으면서 장구를 쳤다. 힘이 좋을 때라 연습도 안 하고 한 번에 녹음을 끝냈다. 나중에 음반을 보내줘서 중앙우체국으로 찾으러 가니 사치품이라서 관세를 내라고 했다. 세금 내고 내 음반을 찾아왔다.”
8. 그는 실패한 사업가였다?
“1960년대 악기 제작자의 권유로 색소폰의 마우스피스 제작에 손댄 적이 있다. 미국 갈 일이 있어서 재즈 거장들에게 보여줬더니 말로는 ‘좋다’고 하면서도 막상 구입하지는 않더라.”
9. 그의 작품 <미궁>을 3번 이상 들으면 죽는다?
“1970년대 가야금만으로 어떤 전위 음악보다 더 전위적인 작품을 써서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야금의 전통 연주법은 쓰지 않고 첼로 활과 장구 채, 거문고의 술대로 가야금 현을 때려가며 새로운 소리를 얻었다. 30여 년 뒤 인터넷 세상이 되자 뒤늦게 <미궁>을 접한 아이들이 놀라서 ‘작곡가는 자살했다’ ‘세 번 들으면 죽는다’는 등 별의별 소문을 만들었다. 군대에서는 담력을 기른다고 새벽에 틀어준다고 한다.”
10. 교수 황병기는 커닝페이퍼를 장려했다?
“시험 잘 보려고 쓸데없는 것까지 외워야 하는데다, 모든 시험에는 반드시 커닝하는 학생이 있다. 성실한 학생들만 손해 보는 불공평을 없애기 위해 A4 종이를 4분의 1 크기로 잘라서 커닝페이퍼를 시험장에 들고 오도록 했다. 종이가 크면 공부를 안 하니까, 작게 만들어서 외울 필요가 없는 내용만 적어오게 했다.”
황병기
1936년 서울 출생.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다녔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 공부를 했다. 결혼도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우다 만난 소설가 한말숙 씨와 했다. 1962년 첫 가야금 창작곡 <숲>으로 창작 국악에 불을 지폈다. 1975년 무용가 홍신자와 발표한 <미궁>으로 한국음악계에 충격을 던졌다. 이화여대 교수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냈고, 현재 ARKO가 주최하는 ARKO 한국창작음악제 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창수의 The House Concert
2002년 음악가 박창수의 집에서 시작된 국내 최초의 살롱 음악회로 클래식, 대중음악, 국악 등 다양한 음악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지난 10년간 다양한 예술장르가 공존하고 실험정신이 살아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올해 7월 ‘하우스 콘서트 대한민국 공연장 습격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일주일간 100개의 공연을 개최하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전국 공연장에 하우스콘서트 형식의 공연을 올리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2008년부터 ARKO의 음악 분야 예술전용공간지원 사업으로 문화예술진흥기금을 지원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