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객석] 2012년 8월호- 세상에 외치는 프리, 뮤직
- 등록일2012.08.05
- 작성자박창수
- 조회1593
글_정우정
"프리, 뮤직 페스티벌"
세상에 외치는 프리, 뮤직
"만약에 당신이 관객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들은 당신의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 배우 캐서린 햅번. 작곡가 박창수의 "프리, 뮤직 페스티벌" 안내 책자 첫 장에 인용된 글귀이다. 2002년 여름, 그의 자택에서부터 시작된 "하우스 콘서트"의 작은 문화운동이 서울을 벗어나 올해는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158명의 연주자들과 일주일 동안 23곳에서 벌인 100회 공연의 습격작전. 그는 열정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전국 문예회관의 문을 두드렸다.
소통은 어느 자리에 있나
40대 후반의 작곡가이자 실험적 연주를 펼치는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져 있는 박창수의 또 하나의 직함은 " 더 하우스 콘서트" 예술감독이다. 형식과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20세기 한국의 공연예술계에 "난 반댈세!"의 출사표를 던지고 직접 "공연 큐레이터"로 나선 지 벌써 십 년째다. 그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하우스"라는 소박한 형태의 공간을 마련해주고, 자신이 겪었던 실험에 대한 억압의 한을 기회의 장으로 펼칠 수 있도록 도와왔다.
"음악은 "소통"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상대방이 들어주는 것이죠. 관객의 반응을 연주자가 느꼈을 떄는 연주력이 바로 달라져요. 특히 우리나라 클래식 공연에서는 교감이 부족합니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만 있어요. 관객들은 공연을 보러 왔지만, 실상 소외감을 가지고 돌아가는 거죠."
지난 7월 13일. 안동문예회관에서 만난 박창수는 클래식 공연문화에서 외면당해온 것이 "교감"이라며, 그것으로 인해 관객도 음악도 갈 곳을 잃었다고 말했다. 누군가 같이 갔더라면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온 문제를 왜 새삼스럽게 꺼내느냐 하겠지만, 그가 십 년이 넘도록 주도면밀하게 펼쳐온 공연의 형태를 지켜본 이라면, 이것은 하루 아침의 고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자신의 자택 작업실과 서울 곳곳의 자그마한 공연장을 활용했던 그가 올해 타깃으로 삼은 것은 전국에서 편히 쉬고 있던 대형 문예회관이었다.
올해 하우스 콘서트는 "프리, 뮤직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23개 문예회관에서 7일간 동시에 100회 공연을 열었다. 60여 개의 팀, 총 158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이번 페스티벌은 연주회장의 객석을 막고 관객을 무대 위로 올려 연주자와 같은 선상에 앉도록 했다. 이것은 소박한 집에서도 음악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작곡가 박창수의 "하우스 콘서트"를 문예회관으로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500석, 크게는 1천 석이 넘는 극장들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 100명의 관객이 온다면 얼마나 허전하겠어요. 연주자들도 흥이 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 지역 곳곳에 있는 문예회관들이 공연을 열지 않죠. 그렇지만 생각을 바꿔 관객들을 무대 위로 올린다면 작은 하우스 콘서트 느낌이 날 것이고, 소리도 훨씬 좋을 겁니다. 연주자도 관객과 더욱 가까워지니까 관객에게 집중하게 되죠. 그래서 올해 전국 문예회관의 객석을 다 막아버렸습니다."
그가 말하는 그의 "반골 기질"이 발상의 전환으로 발휘됐다. " 공연장은 많고 연주자는 넘쳐나는데 왜 연주자는 홀이 없어 아쉽고, 공연장은 연주자가 없어 아쉬운 현상이 일어나느냐"는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그 안에 자명하게 있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해 전국 곳곳에 건축되기 시작한 덩치 큰 예술회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었고, 누군가 몸소 보여줄 때가 필요했다. 바로, 지금이 때였다. 그는 가감없이 객석의 의자를 가리고 무대를 십분 활용했다. 그가 실제로 실현시킨 것은 공간의 축소와 확장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만지고 있는 것은 공연의 거품이다. 연주회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본질적인 것만 남겨 무대를 재탄생시켰다. 나아가 공공기관의 담당자들에게 던지는 "문제 제기"가 이번 페스티벌의 주 목적이었다.
검증된 것의 부정
"사람들은 선택을 두려워해요. 검증된 것만 선호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감각적으로 선택하라는 겁니다. 수동적으로 검증된 것만을 받아들이지 말고 찾아 나서라는 거예요. 이것은 어쩌면 다양성의 부재일지도 모르죠."
현장성이 결여되어 있는 한국의 관객들에게 "촌스럽다"는 표현을 붙이며, 그는 관객도 도전하기를 부탁했다. 사진 찍고 싶으면 찍고, 눕고 싶으면 눕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 함께 음악을 만들자는 새로운 형식의 공연문화를 주창하며 지역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날 안동 공연은 전날 서울 공연보다는 확실히 경직되어 있었다. 서른명 남짓한 관객은 미동이 없었고, 당일 연주자인 젊은 작곡가 전민재, 하다운, 손일훈이 잠옷 바람으로 나오든, 피아노를 치다 거울을 보든, 진지한 자세로 관찰할 뿐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객석이 아닌 무대에 앉아있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한 번씩의 "멘탈 붕괴"는 경험해야 했을 것이다.
점점 더 강해지는 그의 "반골 기질"에 쉼표를 찍기 위해 당신에게 음악이란, 또 창조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 제게 음악은 "배설"이에요.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싫어서 하는 것도 아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이것을 해서 난 행복하다? 이런 이야기 싫어요. 배설을 제 때 안하면 병이 들어서 죽잖아요. 그리고 창작이란 "발견"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취할 뿐이죠"
예술가의 내적 갈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창수를 통해 무엇보다 많이 변하는 것은 연주자였다. 그는 본인이 연주자이자 작곡가이기 때문에 저들 예술가에게 시기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읽어내는 안목이 있었고 그것을 "하우스 콘서트" 라고 하는 실험 무대를 통해 펼쳐내기를 바랐다. 가령 관객을 5미터 앞에서 만나는 것으로 연주자는 이미 본질과 가까워진 셈이다. 예술가는 무엇보다 자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결국 그들이 영향을 끼쳐야 할 대상은 관객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듯이 말이다. ""이 무대만을 위한 연주를 만들어보라"라고 연주자들에게 주문하면 반 이상은 못하겠다고 해요. 예술가들이 해야 하는 일은 원래 이런 일 아닌가요?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예술행위가 아니라 과시행위죠. 다들 정상이 아니에요. 그들도 정신을 차려야 해요." 어눌하지만 심지 굳은 억양으로 그는 말했다.
참여 아티스트 작곡가 전민재
올해 페스티벌에서 괄목할 만한 연주자들이 많았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작곡 부문 최연소 1위 수상자"라는 수식어가 자존심 상한다는 "검증된 작곡가" 전민재가 누구보다 눈에 띈다. 박창수 예술감독과는 스물세 살의 터울이 나는 26세의 젊은 작곡가 전민재. 반가운 마음에 "2012 프리, 뮤직 페스티벌"에 참여한 그의 소감과 2010년 7월, 본지 인터뷰로 짧게 만났던 그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몇 가지 물어봤다.
이하 작곡가 전민재와의 일문일답.
하우스 콘서트는 이번이 처음인가요?
지난해 4월에 10대•20대•30대•40대•50대 작곡가를 한 명씩 선정해서 열었던 "작곡가 시리즈"에 20대 작곡가로서 참여했고, 8월 여름에 (하)다운이, (손)일훈이와 함께 오늘처럼 즉흥연주를 했었어요. 그리고 지난해 12월에 갈라 콘서트 무대에서 (손)일훈이랑 한 번 더 섰었고요.
갖춰진 무대에서 벗어난 실험적인 무대는 연주자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오히려 이런 형태를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지방 간의 문화 갈등을 박창수 선생님께서 해소시키려고 하는 것은 정말 의미가 깊다고 생각해요. 함께 무대 안에서 어울리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 문화인 판소리에서 추임새를 넣어주듯, 어떻게 보면 우리 정서에 맞다고 생각해요. 때론 더욱 좋을 때가 있죠.
지방에서 연주한 경험이 있나요?
아주 어렸을 때 플루트 앙상블 팀과 함꼐 지방에서 연주를 해온 적은 있었는데, 작곡가가 된 이후로는 처음이었어요. 일단은 굉장히 재밌었어요. 너무 궁금했었거든요. 지방 관객들이 얼마나 올까. 어떻게 연주를 감상할까. 서울에 비해 연주 빈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궁금했죠. 이번 보령 연주 때 피아노 인사이드 기법(피아노 몸통 안의 향판이나 현을 활용하는 연주 기법)사용 한 적이 있었는데, 꼬마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피아노 앞으로 걸어 나와서 구경하는 거에요. 전 재밌었어요. "얘네들 뭐 하는 거야" 하는 표정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더 관객들하고 소통한다는 느낌이 들었죠. 인간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것은 연주자의 입장에서는 예상에 없던 돌출이 아닌가요? 음악에 영향을 끼치지 않나요?
만약 그 아이가 악기를 만졌다면 영향이 있었겠지만, 와서 지켜본 것이기 때문에 저희가 하던 대로 했죠.
박창수 씨가 펼치는 하나의 문화운동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겁니다.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그런얘기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선생님 시대 혹은 선생님 그 윗세대 분들은 어떻게 보면 토양을 만드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진은숙•박창수 선생님 세대부터 진정한 음악가들이 출현한 것 같아요. 창작이라는 것 자체는 시간을 두고 기다려줘야 나오는데, 한국은 빨리빨리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작곡가들을 기다려 줄 수 있는 무대가 적었죠.
현재를 사는 작곡가 전민재 씨는 창작에 대한 특별한 견해가 있나요?
반대로 생각해서 모차르트 때문에 먹고사는 인구가 얼마이며, 피카소 때문에 먹고사는 인구가 얼마인데, 우리나라는 그런 것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죠. 예를 들어 명창 김소희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나라에서 해준 게 없잖아요. 프랑스에서는 생상스가 죽었을 때, 국장을 치러주었어요. 가장 대우를 받아야 되는 존재가 창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창작이 없으면, 연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든요. 그러나 현실은 당장 무대에 올려 바로 효과가 있는 곡들만을 찾죠. 그렇게 되면 사실 악순환이거든요. 발전이 없는 거죠, 예술이.
검증된 음악가는 항상 최상의 결과물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검증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인식을 형성할 뿐이에요. 작곡가가 쓰는 곡이 다 좋을 수는 없잖아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을 걸을 수도 있는데, 사람들은 정상에 오른 것만을 보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죠. 다 경쟁의 처참한 진상인 것 같아요.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요?
사고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기초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가능성을 모두 열어 자율성을 주고, 가지를 쳐주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니까요. 저도 그렇게 배워왔고요.
본인에게 음악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어려운 질문이긴 한데, 한마디로 저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하나의 이유밖에 없는 것 같아요. 좋아서 하는것. 그렇기 때문에 어떤 미사여구도 동원할 필요가 없죠.
"프리, 뮤직 페스티벌"에 또 참여할 의향이 있나요?
네. 박창수 선생님께서 처음 이 페스티벌을 준비하실 때도 저와 (손)일훈이를 불러 아이디어를 물으셨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선생님께서 이 축제를 고민하실 때부터 옆에서 의견을 들었기 때문에 의도가 정말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언제든지 참여하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후배들을 위해 저도 이런 실험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기도 해요.
"프리, 뮤직 페스티벌"
세상에 외치는 프리, 뮤직
"만약에 당신이 관객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들은 당신의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 배우 캐서린 햅번. 작곡가 박창수의 "프리, 뮤직 페스티벌" 안내 책자 첫 장에 인용된 글귀이다. 2002년 여름, 그의 자택에서부터 시작된 "하우스 콘서트"의 작은 문화운동이 서울을 벗어나 올해는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158명의 연주자들과 일주일 동안 23곳에서 벌인 100회 공연의 습격작전. 그는 열정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전국 문예회관의 문을 두드렸다.
소통은 어느 자리에 있나
40대 후반의 작곡가이자 실험적 연주를 펼치는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져 있는 박창수의 또 하나의 직함은 " 더 하우스 콘서트" 예술감독이다. 형식과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20세기 한국의 공연예술계에 "난 반댈세!"의 출사표를 던지고 직접 "공연 큐레이터"로 나선 지 벌써 십 년째다. 그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하우스"라는 소박한 형태의 공간을 마련해주고, 자신이 겪었던 실험에 대한 억압의 한을 기회의 장으로 펼칠 수 있도록 도와왔다.
"음악은 "소통"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상대방이 들어주는 것이죠. 관객의 반응을 연주자가 느꼈을 떄는 연주력이 바로 달라져요. 특히 우리나라 클래식 공연에서는 교감이 부족합니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만 있어요. 관객들은 공연을 보러 왔지만, 실상 소외감을 가지고 돌아가는 거죠."
지난 7월 13일. 안동문예회관에서 만난 박창수는 클래식 공연문화에서 외면당해온 것이 "교감"이라며, 그것으로 인해 관객도 음악도 갈 곳을 잃었다고 말했다. 누군가 같이 갔더라면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온 문제를 왜 새삼스럽게 꺼내느냐 하겠지만, 그가 십 년이 넘도록 주도면밀하게 펼쳐온 공연의 형태를 지켜본 이라면, 이것은 하루 아침의 고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자신의 자택 작업실과 서울 곳곳의 자그마한 공연장을 활용했던 그가 올해 타깃으로 삼은 것은 전국에서 편히 쉬고 있던 대형 문예회관이었다.
올해 하우스 콘서트는 "프리, 뮤직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23개 문예회관에서 7일간 동시에 100회 공연을 열었다. 60여 개의 팀, 총 158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이번 페스티벌은 연주회장의 객석을 막고 관객을 무대 위로 올려 연주자와 같은 선상에 앉도록 했다. 이것은 소박한 집에서도 음악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작곡가 박창수의 "하우스 콘서트"를 문예회관으로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500석, 크게는 1천 석이 넘는 극장들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 100명의 관객이 온다면 얼마나 허전하겠어요. 연주자들도 흥이 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 지역 곳곳에 있는 문예회관들이 공연을 열지 않죠. 그렇지만 생각을 바꿔 관객들을 무대 위로 올린다면 작은 하우스 콘서트 느낌이 날 것이고, 소리도 훨씬 좋을 겁니다. 연주자도 관객과 더욱 가까워지니까 관객에게 집중하게 되죠. 그래서 올해 전국 문예회관의 객석을 다 막아버렸습니다."
그가 말하는 그의 "반골 기질"이 발상의 전환으로 발휘됐다. " 공연장은 많고 연주자는 넘쳐나는데 왜 연주자는 홀이 없어 아쉽고, 공연장은 연주자가 없어 아쉬운 현상이 일어나느냐"는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그 안에 자명하게 있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해 전국 곳곳에 건축되기 시작한 덩치 큰 예술회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었고, 누군가 몸소 보여줄 때가 필요했다. 바로, 지금이 때였다. 그는 가감없이 객석의 의자를 가리고 무대를 십분 활용했다. 그가 실제로 실현시킨 것은 공간의 축소와 확장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만지고 있는 것은 공연의 거품이다. 연주회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본질적인 것만 남겨 무대를 재탄생시켰다. 나아가 공공기관의 담당자들에게 던지는 "문제 제기"가 이번 페스티벌의 주 목적이었다.
검증된 것의 부정
"사람들은 선택을 두려워해요. 검증된 것만 선호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감각적으로 선택하라는 겁니다. 수동적으로 검증된 것만을 받아들이지 말고 찾아 나서라는 거예요. 이것은 어쩌면 다양성의 부재일지도 모르죠."
현장성이 결여되어 있는 한국의 관객들에게 "촌스럽다"는 표현을 붙이며, 그는 관객도 도전하기를 부탁했다. 사진 찍고 싶으면 찍고, 눕고 싶으면 눕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 함께 음악을 만들자는 새로운 형식의 공연문화를 주창하며 지역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날 안동 공연은 전날 서울 공연보다는 확실히 경직되어 있었다. 서른명 남짓한 관객은 미동이 없었고, 당일 연주자인 젊은 작곡가 전민재, 하다운, 손일훈이 잠옷 바람으로 나오든, 피아노를 치다 거울을 보든, 진지한 자세로 관찰할 뿐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객석이 아닌 무대에 앉아있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한 번씩의 "멘탈 붕괴"는 경험해야 했을 것이다.
점점 더 강해지는 그의 "반골 기질"에 쉼표를 찍기 위해 당신에게 음악이란, 또 창조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 제게 음악은 "배설"이에요.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싫어서 하는 것도 아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이것을 해서 난 행복하다? 이런 이야기 싫어요. 배설을 제 때 안하면 병이 들어서 죽잖아요. 그리고 창작이란 "발견"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취할 뿐이죠"
예술가의 내적 갈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창수를 통해 무엇보다 많이 변하는 것은 연주자였다. 그는 본인이 연주자이자 작곡가이기 때문에 저들 예술가에게 시기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읽어내는 안목이 있었고 그것을 "하우스 콘서트" 라고 하는 실험 무대를 통해 펼쳐내기를 바랐다. 가령 관객을 5미터 앞에서 만나는 것으로 연주자는 이미 본질과 가까워진 셈이다. 예술가는 무엇보다 자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결국 그들이 영향을 끼쳐야 할 대상은 관객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듯이 말이다. ""이 무대만을 위한 연주를 만들어보라"라고 연주자들에게 주문하면 반 이상은 못하겠다고 해요. 예술가들이 해야 하는 일은 원래 이런 일 아닌가요?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예술행위가 아니라 과시행위죠. 다들 정상이 아니에요. 그들도 정신을 차려야 해요." 어눌하지만 심지 굳은 억양으로 그는 말했다.
참여 아티스트 작곡가 전민재
올해 페스티벌에서 괄목할 만한 연주자들이 많았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작곡 부문 최연소 1위 수상자"라는 수식어가 자존심 상한다는 "검증된 작곡가" 전민재가 누구보다 눈에 띈다. 박창수 예술감독과는 스물세 살의 터울이 나는 26세의 젊은 작곡가 전민재. 반가운 마음에 "2012 프리, 뮤직 페스티벌"에 참여한 그의 소감과 2010년 7월, 본지 인터뷰로 짧게 만났던 그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몇 가지 물어봤다.
이하 작곡가 전민재와의 일문일답.
하우스 콘서트는 이번이 처음인가요?
지난해 4월에 10대•20대•30대•40대•50대 작곡가를 한 명씩 선정해서 열었던 "작곡가 시리즈"에 20대 작곡가로서 참여했고, 8월 여름에 (하)다운이, (손)일훈이와 함께 오늘처럼 즉흥연주를 했었어요. 그리고 지난해 12월에 갈라 콘서트 무대에서 (손)일훈이랑 한 번 더 섰었고요.
갖춰진 무대에서 벗어난 실험적인 무대는 연주자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오히려 이런 형태를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지방 간의 문화 갈등을 박창수 선생님께서 해소시키려고 하는 것은 정말 의미가 깊다고 생각해요. 함께 무대 안에서 어울리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 문화인 판소리에서 추임새를 넣어주듯, 어떻게 보면 우리 정서에 맞다고 생각해요. 때론 더욱 좋을 때가 있죠.
지방에서 연주한 경험이 있나요?
아주 어렸을 때 플루트 앙상블 팀과 함꼐 지방에서 연주를 해온 적은 있었는데, 작곡가가 된 이후로는 처음이었어요. 일단은 굉장히 재밌었어요. 너무 궁금했었거든요. 지방 관객들이 얼마나 올까. 어떻게 연주를 감상할까. 서울에 비해 연주 빈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궁금했죠. 이번 보령 연주 때 피아노 인사이드 기법(피아노 몸통 안의 향판이나 현을 활용하는 연주 기법)사용 한 적이 있었는데, 꼬마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피아노 앞으로 걸어 나와서 구경하는 거에요. 전 재밌었어요. "얘네들 뭐 하는 거야" 하는 표정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더 관객들하고 소통한다는 느낌이 들었죠. 인간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것은 연주자의 입장에서는 예상에 없던 돌출이 아닌가요? 음악에 영향을 끼치지 않나요?
만약 그 아이가 악기를 만졌다면 영향이 있었겠지만, 와서 지켜본 것이기 때문에 저희가 하던 대로 했죠.
박창수 씨가 펼치는 하나의 문화운동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겁니다.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그런얘기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선생님 시대 혹은 선생님 그 윗세대 분들은 어떻게 보면 토양을 만드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진은숙•박창수 선생님 세대부터 진정한 음악가들이 출현한 것 같아요. 창작이라는 것 자체는 시간을 두고 기다려줘야 나오는데, 한국은 빨리빨리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작곡가들을 기다려 줄 수 있는 무대가 적었죠.
현재를 사는 작곡가 전민재 씨는 창작에 대한 특별한 견해가 있나요?
반대로 생각해서 모차르트 때문에 먹고사는 인구가 얼마이며, 피카소 때문에 먹고사는 인구가 얼마인데, 우리나라는 그런 것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죠. 예를 들어 명창 김소희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나라에서 해준 게 없잖아요. 프랑스에서는 생상스가 죽었을 때, 국장을 치러주었어요. 가장 대우를 받아야 되는 존재가 창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창작이 없으면, 연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든요. 그러나 현실은 당장 무대에 올려 바로 효과가 있는 곡들만을 찾죠. 그렇게 되면 사실 악순환이거든요. 발전이 없는 거죠, 예술이.
검증된 음악가는 항상 최상의 결과물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검증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인식을 형성할 뿐이에요. 작곡가가 쓰는 곡이 다 좋을 수는 없잖아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을 걸을 수도 있는데, 사람들은 정상에 오른 것만을 보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죠. 다 경쟁의 처참한 진상인 것 같아요.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요?
사고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기초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가능성을 모두 열어 자율성을 주고, 가지를 쳐주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니까요. 저도 그렇게 배워왔고요.
본인에게 음악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어려운 질문이긴 한데, 한마디로 저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하나의 이유밖에 없는 것 같아요. 좋아서 하는것. 그렇기 때문에 어떤 미사여구도 동원할 필요가 없죠.
"프리, 뮤직 페스티벌"에 또 참여할 의향이 있나요?
네. 박창수 선생님께서 처음 이 페스티벌을 준비하실 때도 저와 (손)일훈이를 불러 아이디어를 물으셨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선생님께서 이 축제를 고민하실 때부터 옆에서 의견을 들었기 때문에 의도가 정말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언제든지 참여하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후배들을 위해 저도 이런 실험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