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공식블로그] 2012년 7월 31일- 전국 100회 콘서트를 넘어서...
  • 등록일2012.08.02
  • 작성자류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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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콘서트 10년, 전국 100회 콘서트를 넘어서 “나는 더 큰 도전을 꿈꾼다.” 피아니스트 박창수

도란도란 인터뷰

“일주일간 전국에서 콘서트를 100회 열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아무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응원은커녕 말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불가능할 것 같은 ‘대한민국 공연장 습격작전’을 보란 듯이 성공시켰다. 7월 9일부터 15일, 7일간 21개 도시에서 펼쳐진 ‘프리, 뮤직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이자 ‘더 하우스 콘서트’의 대표인 피아니스트 박창수의 이야기다.

2002년 7월 박창수 대표는 한국 최초로 집에서 공연을 펼치는 하우스 콘서트를 열었다. 연희동 자택에서 출발한 ‘더 하우스 콘서트’는 클래식, 프리뮤직, 국악, 대중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연주자들과 함께 10년을 달려왔다. 자택에서 도곡동 율하우스로 장소를 바꾸고 300여회가 넘는 공연이 계속 이어졌다. ‘마룻바닥에서 듣는 진짜 음악’에 반해 한번 찾은 관객들이 다시 찾는 콘서트라고 은근한 입소문도 탔다. 2012년에 열린 ‘프리, 뮤직 페스티벌’은 하우스 콘서트 10년의 방점을 찍는 도전이자, 더욱 큰 도전으로 나아가는 발판이기도 하다. 그 모든 도전의 정점에 있는 박창수 대표를 만났다.

하우스콘서트, 대한민국 공연장을 습격하다

프리, 뮤직 페스티벌의 부제는 ‘하우스콘서트, 대한민국 공연장 습격작전’이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마루에서 가까이 듣는 하우스 콘서트의 특징을 그대로 담은 공연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렸으니 그야말로 ‘습격’이 아닐 수 없다. 하우스콘서트는 왜 이런 습격을 감행해야 했을까? “서울의 유명 극장의 작은 홀에 1년 동안 공연하겠다고 신청하는 사람이 1,000팀이 넘습니다. 하지만 4팀 중 1팀 꼴로 무대에 설 수 있죠. 지방은 사정이 달라요. 공연장이 400여 곳 되는데 몇 개 빼고는 텅텅 비어갑니다. 원래 지어진 목적인 공연이 없으니 민방위 훈련 등에 쓰이고 있고요. 800명 이상 수용하는 극장의 하루 대관료가 가장 저렴하면 4만원이에요. 그런데도 연주자들이 찾지 않아요. 놀랍지 않나요?”

지방 공연장이 활성화된다면 좋은 공연에 목말라 하는 지방 관객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주자들에게도 더 넓은 무대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괜찮은 연주자들 많아요. 문제는 유학을 마친 직후엔 굉장히 잘하지만 2년만 지나면 실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겁니다. 연주자들이 서울에 몰려 무대에 설 수가 없으니까요. 1년에 한번 공연을 할까 말까 한데 어떻게 실력이 늘겠어요? 외국에서는 지방 공연도 많이 하고 작은 공연도 하니 계속 훈련이 되지만 한국에선 그러지 못하거든요.” 설 곳이 없는 괜찮은 연주자들과 비어있는 괜찮은 지방 공연장들을 연결하겠다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박창수 대표가 몸소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각개전투로 이뤄낸 프리, 뮤직 페스티벌

지금은 하우스 콘서트와 프리, 뮤직 페스티벌에 매스컴과 음악계의 관심이 쏟아지지만 처음부터 도전이 순조롭진 않았다. “문화예술계 단체들과 인사들을 만났어요. 일주일간 열리는 100회 콘서트를 기획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죠. 다들 아이템은 좋다고 하면서도 절대 불가능하다더군요. 하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400개나 되는 극장 중에 20군데만 섭외하면 되는 일이였거든요. 분명 가능한데 왜 불가능하다고 할까? 서운했고 또 오기가 생겼어요. 그럼 직접 뛰겠다고, 하우스 콘서트 스태프와 각개전투 했죠.”

하우스 콘서트의 스태프와 자원봉사자들이 열정적으로 뛰어준 덕분에 프리, 뮤직 페스티벌은 성공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어려운 음악 안 된다’고 생각하는 지방 공연장들을 설득하느라 스태프들이 눈물을 쏙 빼기도 했다. 관장 선에까지 섭외 요청이 전달되지 않고 단칼에 거절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지방 관객들은 프리, 뮤직 페스티벌을 찾았고, 각 지방 신문사들은 앞 다퉈 그 소식을 지면에 실었다. 놀란 것은 오히려 공연장 관계자들이었다. 공연장에 관객이 그렇게 찾아오는 것을 처음 봤단다. 거절했던 공연장이 다음에는 참여하고 싶다고 연락해오기도 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 할 일이다.

프리, 뮤직 페스티벌의 특기할 만 한 점은 관객을 객석이 아닌 무대 위로 불러 올렸다는 데 있다. 관객 모두가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연주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음악과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는 하우스 콘서트의 방식을 최대한 적용한 것이다.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연주자와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남다른 경험이고, 지방 관객들은 아마 처음 해본 경험이었겠죠. 보통 공연이 끝나고 로비에서 리셉션을 하면 연주자가 드레스 차림으로 서있고 관객들이 “저 왔어요, 공연 축하해요.” 쭈뼛쭈뼛 인사하고 말아요. 무대와 객석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심리적 거리를 형성하니까 연주자와 관객이 어색한 관계로 남는 거죠. 그런데 관객들이 무대에 올라오면 자연스럽게 연주자와 가까워져요. 공연 끝나고 “어떤 노래 더 연주해주세요” 하는 말도 잘 나오죠. 일률적인 ‘앵콜’ 같은 게 아니라. 연주자, 관객 모두 그날 공연에 대한 친밀감이 굉장히 커집니다. 일반 공연장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100회는 5,000회의 프리뷰일 뿐

100회 콘서트만으로도 큰 산을 넘었다 싶은데 박창수 대표가 애초에 목표했던 지점은 아직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내년 한 해 동안 공연 5000회를 하려고 해요. 전국 400개 극장 중에 100개의 극장이 각각 일주일에 한번 씩 계속 공연을 하는 거죠. 그럼 한 극장에서 1년 동안 50번 공연할 수 있거든요. 100개의 극장이 50번씩 공연하면 5,000회 공연이 만들어지죠. 5000회라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방 공연장이 꾸준히 돌아가게끔 연주자와 관객 모두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공연을 열려는 것입니다.”

일주일간 100회의 콘서트를 만들었던 것은 내년에 5,000회의 콘서트를 열기 위한 ‘프리뷰’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100개 극장을 섭외하는 것은 어렵고, 또 5,000회가 가능하리라고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증명을 위해 100회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제 5,000회도 가능하리라는 확신이 드느냐”고 묻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확신은 이미 있었습니다. 극장을 확보할 수 있다, 5,000회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올해 100회부터 한 거예요. 100회가 가능할 거라고 말할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하고 나니 100회는 되도 5,000회는 안될 거랍니다. 하우스 콘서트 시작할 때도 주위에서 성공 못한다고들 했지만 10년이 넘게 해오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하면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더 해야 돼요.”

1년간 5000회의 공연을 열겠다는 큰 꿈. 사람들은 그를 두고 무모하다거나 이상적이라고도 할지도 모르지만 6년 전부터 차근차근 밟아온 계획은 퍽 구체적이다. “공연할 250개 팀을 꾸릴 거예요. 그리고 한 팀당 하나의 레퍼토리로 스무 번씩 공연하게끔 하는 겁니다. 한 공연장이 아니라 지역마다 돌아다니면서. 그럼 연주자들의 실력 또한 향상될 수밖에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의문을 품을 사항은 단연 예산에 관한 부분이리라. 공연이 이뤄지기 위해선, 연주자를 섭외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그는 “지역의 공연장마다 한해에 배당된 예산이 있어요. 그런데 1년에 서너 번밖에 공연이 이뤄지지 않으니 몸값이 비싼 유명한 음악가 섭외하는 데 예산을 다 씁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유망한 신인 음악가들을 섭외하는 데 쓴다면 50회 공연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이미 유명세가 있는 음악가를 세우는 것과 가능성 있는 신인을 발굴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문화 저변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까요? 답은 나와 있죠.”라고 설명했다.

아름다운 도전? 외로운 싸움

박창수 대표는 고집과 원칙을 가진 사람이다. 가장 큰 원칙 중 하나는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달에 두 번 열리는 하우스 콘서트의 입장료는 2만원. 그 중 반이 연주자 개런티로 쓰인다. 나머지는 하우스 콘서트 운영에 쓰이지만 도저히 흑자가 날 수 없다. 프리, 뮤직 페스티벌의 운영도 마찬가지였다. 공연장들이 대관료 없이 협조해주었고 58팀 총 158명의 연주자들도 노개런티로 임했다. 입장료도 무료에서 최대 만원이었다. 페스티벌의 총예산은 모든 교통비, 숙박비, 인쇄물을 더해도 약 5,000만원이 전부, 웬만한 유명 연주자 한명만 섭외하면 동나는 액수다. 적자도 마다 않는 아름다운 희생과 노력이라는 ‘미담’으로 수많은 언론에 실렸지만 정작 박창수 대표는 그런 반응이 달갑지만은 않다.

“지방 관객들을 위해서 아름다운 일을 했다는 칭찬을 듣길 원하는 게 아닙니다. 마땅히 필요한 일이고 해야 할 일인데도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거나 알아도 의지가 없고, 불가능하다고만 얘기해요.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게 안타깝고 화도 났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고 회유하고 설득하면서, 맨몸으로 ‘습격’하고 일을 벌인 거죠.”

힘들고 귀찮은 일을 이렇게 혼자서 발 벗고 뛰게 되는 원동력이 뭐냐고 물으니 “글쎄요, 사명감…?”이라 짧게 답하고 박창수 대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런 일을 손해 보면서 굳이 하느냐’는 질문은 그에게 무의미한 듯했다. 그의 삶을 통틀어 행해지는 모든 노력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왜 문제가 보이는데 고치려 하지 않느냐’고.

집에서 콘서트를 열어 소수 관객들로 이뤄지는 공연을 열고, 이제는 지방에까지 하우스 콘서트를 전파하고 나선 그를 바라보는 오해의 시선도 있다. “사람들이 제가 돈이 많은 줄 알아요. 과시 하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절대 그렇지 않고요. 하우스 콘서트도 프리, 뮤직 페스티벌도 그것들이 필요한 일이니까 하는 거지 여유가 있어 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이 제 사정을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

‘더 하우스 콘서트’는 긴 세월을 들여 작곡한 하나의 작품

박창수 대표는 ‘더 하우스 콘서트’의 대표이기 전에 피아니스트, 작곡가, 프리뮤직(즉흥연주) 연주가다.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하기 전엔 타고난 음악인이 새로운 형식의 콘서트를 만드는 공연기획자로서 새로운 직업을 가진 스토리를 상상했었다. 하지만 “저는 공연기획자가 아니에요. 기획이라는 건 하나의 사업인데 제가 하우스 콘서트로 사업을 하려고 했으면 벌써 문 닫았을 것”이라고 그는 공연기획자라는 호칭을 거부했다. 하나의 곡을 작곡하는 것처럼 긴 흐름의 하우스 콘서트를 한 작품처럼 작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연주하는 프리뮤직이 순간적으로 음악을 작곡해내는 것이라면, 하우스 콘서트는 긴 세월을 들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음악 작품인 셈.

따라서 10년을 이어져 온 하우스 콘서트의 모든 순서와 내용은 그가 작곡하듯이 구성한 것이다. 이번 공연이 대중음악이었다면 다음 공연은 클래식 연주를 배치해 균형을 맞추는 식이다. 1년의 공연 플랜이 한 덩어리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유명 연주가가 무대에 서주겠다고 연락해 오더라도 전체 흐름이 있기 때문에 거절하고 1년 뒤에 부를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프리, 뮤직 페스티벌 또한 어느 지역에서 언제 어떤 공연이 이루어질지 박창수 대표가 화음을 구성하듯이 짜 맞추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막판까지 자신이 어느 지역에 가게 될지 몰랐다고 한다. “연주자를 섭외할 때 내건 조건이 1시간 이내로 공연해야 한다, 개런티는 없지만 차비는 주겠다, 어디로 보내줄지 모른다는 거였어요. 그래도 나를 믿고 따라오겠냐고 했을 때 OK 한 90%의 사람들을 세운 거죠. 10%는 거절했는데 그 사람들은 다신 안 불러요. 철저히 응징하거든요. (웃음)” 뒤끝 있고 고집 세고 한번 세운 원칙과 한번 뱉은 말은 꼭 지키는 그의 성격 때문에 후원도 못 받는다고 스태프들이 우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지만, 원칙과 고집 때문에 하우스 콘서트가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리라.

적은 개런티에도 1,000여명의 연주자들을 세울 수 있었던 힘

‘더 하우스 콘서트’의 연주자들은 장르과 국적을 불문한다. 10년 동안 1,300여명의 음악인들이 하우스 콘서트의 마루에 섰다. 그중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외르크 데무스도 있었고 어린 10대 작곡가들도 있었다. 연주자를 섭외할 때도 박창수 대표의 원칙은 살아있다. 하우스 콘서트가 유명해지기 전 초반에는 다음에 있을 큰 공연의 리허설 격으로 하우스 콘서트에서 그대로 하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박창수 대표는 하우스 콘서트만을 위한 레퍼토리를 요구했고 연주자가 응하지 않으면 절대 섭외하지 않았다.

기성 연주자도 하우스 콘서트의 무대에 서지만 박창수 대표는 신인 발굴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은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김선욱, 김태형도 무명 시절부터 하우스 콘서트에 서왔다. 하우스 콘서트에 한번 오른 많은 연주자들이 프리, 뮤직 페스티벌에도 다시 함께했다. “그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부터 무대에 세웠으니 자신들을 알아봐줬다는 고마움을 잊지 않는 것 같아요. 이번 프리, 뮤직 페스티벌에도 연주자들이 무보수로도 OK 했던 게 그런 이유겠죠. 아무리 뛰어난 기획자라 하더라도 이런 훌륭한 연주자들 90%가 참여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어디 가서 자랑하고 싶어요. 돈이 아니라 마음을 산 것이잖아요.”

하우스 콘서트는 한번 온 관객들은 다시 찾아오기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연주자들도 한번 발을 담그면 대부분 계속 하우스 콘서트와 함께한다. 하우스 콘서트를 위해 일하는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무보수로 8~9년씩 함께하는 스태프도 있고, 깐깐한 박창수 대표의 불호령에도 묵묵히 일한다. 그가 처음 5,000회 콘서트를 하겠다 선언했을 때 스태프들은 아무도 그걸 어떻게 하냐고 묻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음악 하나만 두고 연주자도 관객도 스태프도 강한 신뢰로 묶는 하우스 콘서트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깨닫게 된 거겠죠. 돈도 화려함도 아니에요. 소통이에요. 음악가들이 음악 하는 이유는 과시 같은 게 아니라 내 연주가 타인에게 전달되길 바라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전달은 안 되는데 돈만 갖는다면 행복하지 않잖아요. 화려한 데서 열심히 연주해도 ‘통한’ 사람이 없으면 공허해져요. 무대가 초라하고 개런티가 작아도 내 음악을 상대방이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만큼 가치 있고 감사한 게 없죠. 음악으로 진짜 소통하는 행복을 알게 돼서 연주자도 관객도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박창수 대표는 음악의 힘, 사람의 힘을 아는 사람이었다. 10년간 쉬지 않고 더 좋은 음악, 계속 새로운 도전을 향했던 박창수 대표에게 마지막으로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 사회의 문화 의식이 조금이라도 향상될 수 있다면, 내가 그 역할에 일익 할 수 있다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제대로 해야겠죠.”

(전략) 흔히 사람들은 정치 경제를 바꿔야 문화가 풍요로워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정치 탓, 경제 탓을 하지만 사실 가장 먼저 변화되어야 할 것은 문화입니다. 문화가 바뀌면 다른 것이 함께 바뀌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 예술이 중요한 것이고, 또 필요한 것이겠지요. 이제는 그 기본적인 주체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백 개의 공연장, 오천 회의 공연 기획, 이 숫자는 단순히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가 아닌, 가능한 일을 실천하려는 THE HOUSE CONCERT의 의지입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응원 부탁드립니다. _ 2012 프리, 뮤직 페스티벌의 여는 말 中 예술감독 박창수

► 더 하우스 콘서트 홈페이지 http://www.freepiano.net
► 프리, 뮤직 페스티벌 홈페이지 http://www.freemusicfestival.net

유은수 대학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