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객석] 2011년 9월 - 박창수의 프리뮤직 On Screen 리뷰
- 등록일2011.09.01
- 작성자박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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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의 프리뮤직 On Screen 리뷰
결코 “그냥”이 아니었다.
‘프리뮤직’에서 ‘프리(Free)’는 분명 자유를 뜻하지만, 박창수의 음악 앞에 붙는 ‘프리’는 빽빽한 계산과 실험을 통해 누적된 그만의 체험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는 ‘자유’를 애써 전달하려 하지 않고, 관객이 먼저 느끼게끔 배려했다 (8월 11일 금호아트홀)
월간 객석 9월호 ㅣ 글: 송현민 기자
공연 전 박창수가 마이크를 잡았을 때, 내심 연주될 음악에 대한 간략한 해설을 기대했다. 하지만 박창수는 ‘그냥’이라는 단어가 드문드문 섞인 문구로 인사를 했다. “그냥 해봤다.” “그냥 두어번 맞춰봤다.” 연주에 관해 주어진 정보는 그것이 전부였다. 해금 연주자 강은일과 전자음악가 치노 슈이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악의 길은 오로지 세 사람만이 알고 있는 듯했다.
연주가 시작되자 박창수는 피아노의 전방을 스크린을 향해 돌려놓은 채 연주했다. 강은일과 치노 슈이치도 스크린을 향해 앉았다. 연주자들은 서로 마주 보지 않았고 그런 위치에서 시선이 어떻게 교차될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영화가 상영되었다. 독일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의 ‘들고양이(Die Bergkatze)’. 1912년에 제작된 무성영화로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약혼자, 또 다른 여인과의 삼각관계가 주된 내용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설정들로 무장한 코미디였다. 연주는 처음부터 영화의 분위기와 대조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첫 장면.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는 군인들의 모습은 찰리 채플린을 연상케 했다. ‘쿵짝쿵짝’ 하는 4분의 2박자 계통의 음악이 떠올랐지만 그들의 음악은 이러한 발상을 무색케 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더 많이 웃었다. 관객이 웃을 때, 그 웃음을 무화시키는 어두운 음악을 연주하거나 차분하게 진행되는 장면에서는 거침없는 타건과 신경질적인 보잉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날 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묘한 분위기였다.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삼각관계 속 주인공들의 고뇌와 갈등은 깊어지지만, 좌충우돌한 그들의 연기는 점점 슬랩스틱 코미디가 되어갔다. 당연히 관객들의 웃음은 잦아졌고 커졌다. 하지만 박창수의 음악은 관객들의 웃음과 더 많은 충돌을 일으키는 듯 했다.
눈을 감고 영상을 지워보았다. 조성과 선율을 제거한 박창수의 연주는 드로잉을 거부한 채 오직 점, 선, 면의 배치만으로 화폭을 채우는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떠올리게 했다. 80여분 동안 그들의 연주는 멈추거나 단절되지 않았다. 박창수는 끊임없이 음을 분산시켰고 유기적 구조를 해체하며 흩뿌렸다. 그의 음악은 ‘점’과 같았다. 치노 슈이치는 ‘면’ 이었다. 전경보다는 후경에 머물면서 박창수가 흩뿌리고 산재한 음의 요소들을 주워 담고 감싸 안았다. 강은일은 ‘선’이었다. 산조, 민요 선율이 뒤섞인 날카로운 선율로 박창수의 ‘점’들을 연결했고, 치노 슈이치의 ‘면’에 감싸여졌다.
그들의 음악을 통해 칸딘스키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실험이 허용하는 ‘자유’ 때문일 것이다. 프리뮤직이라는 장르를 온몸으로 밀어붙이는 그의 실험은 분명 관객들에게 자유를 허락한다. 영상의 밀착된 흐름보다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흘러가는 모습을 자신이 먼저 보여주고 관객들 또한 각자의 호흡으로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봐도 되는 자유를 허락한다. 첫 인사에서 멘트 부분부분 들리던 ‘그냥’의 전략을 알 것 같았다.
공연 전 박창수는 인터뷰에서 “그냥 영화에 집중하시면 결국 자연스럽게 음악이 함께 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대책 없는 느긋함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실험을 통해 대중과 거듭 만나면서 이끌어낸 결론이다.
오늘날 시각과 청각을 아우르는 실험적인 공연이 많아지면서 관객에 대한 배려 없이 무리한 참여와 이해를 요구하는 공연이 많다. 하지만 음악은 어차피 귀로 들어오고 그림은 눈으로 들어온다. 실험에 있어 ‘말 만들기’는 쉽고 실제적인 표현의 ‘몸 만들기’는 어렵다. 이런 현실에 비춰볼 때 박창수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몸 만들기’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법을 알고 있는 연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향후 박창수의 실험 도구가 피아노를 한 번쯤은 벗어나 보았으면 한다. 물론 그에게는 피아노가 가장 잘 어울린다. 하지만 지휘봉을 든 박창수, 노래를 부르는 박창수를 기자 외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