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1년 8월 31일 - [ESSAY] 나를 꿈꾸게 한 ‘하우스 콘서트’ 10년
  • 등록일2011.08.31
  • 작성자박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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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나를 꿈꾸게 한 ‘하우스 콘서트’ 10년
박창수 작곡가 • 피아니스트


- 서울 연희동 집 2층 개조해 거실에서 연 클래식 연주회 마룻바닥 앉아 온몸으로 감상
- 피자 10판 구워오는가 하면 즉석연주 나서는 열성관객도 어느덧 300회, 2만명 찾아
- "집에서 음악회를 연다고? 네가 무슨 귀족이나 재벌도 아니고…."


10년 전 집에서 콘서트를 열고 싶다고 처음 말했을 때, 주위에선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무슨 돈으로 연주자들을 부르고, 프로그램은 어떻게 꾸릴 거냐"며 따지듯 묻는 이도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 집 마룻바닥에 앉아 서로의 연주를 감상하며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 없었다. 마룻바닥을 울리는 미세한 떨림을 온몸으로 느꼈던 감상(鑑賞) 경험은 20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생생했다.

그 당시 살고 있던 서울 연희동 단독주택 2층 방 3개의 벽을 허물고 널찍한 마루를 만들었다. 살림살이는 1층 비좁은 공간으로 밀려나야 했다. 이렇게 시작한 "하우스 콘서트"가 벌써 300회를 눈앞에 두게 됐다. 한 달에 평균 2차례 클래식 연주를 위주로 국악, 대중음악, 프리뮤직 등 다양한 장르의 무대를 가졌다. 연희동 집에서 시작한 하우스 콘서트는 중곡동, 역삼동을 거쳐 현재 도곡동의 지하 스튜디오로 옮겼지만, 마룻바닥에 앉아 연주를 즐긴다는 원래 아이디어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우스 콘서트"는 여느 공연장처럼 엄숙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아기들이 마룻바닥에 퍼질러 앉은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흥이 난 관객이 악기를 잡고 직접 연주에 뛰어들기도 한다. 연주자가 흘리는 땀방울이 바로 발치에 앉은 관객에게 튀는 공연장이 흔하겠는가. 관객들도 적극적으로 음악회에 개입한다. 매번 깨알 같은 후기(後記)를 홈페이지에 남기는 사람도 여럿이고, 지금도 쓰고 있는 하우스 콘서트 문패를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관객도 있다. 신발 정리 같은 소소한 일을 거들고 나서기도 한다. 근처에서 피자 가게를 하는 분은 한 번 와본 후 감동을 받은 나머지 연주자와 관객, 스태프 모두에게 대접하고 싶다며 피자를 열 판도 넘게 구워 왔다.

지금까지 하우스 콘서트를 찾은 관객 수를 모두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2만 명은 넘을 것이다. "이윤을 남기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이렇다 할 스폰서도 없는 상황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사랑하는 이들의 지지와 성원이 없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우스 콘서트"의 또 다른 주역은 기껏해야 100명 남짓한 관객을 만나기 위해 기꺼이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들이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조성진•김태형,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첼리스트 송영훈, 클라리넷 주자 김한 등 우리 음악계를 이끌어나갈 주역들이 이 무대에 섰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기타리스트 이병우, 가수 강산에 등이 연사나 연주자로 나섰다. 사실 이분들이 평소에 받는 출연료를 생각하면 "착취"라고 할 수밖에 없는 사례를 하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이 무대에서는 새로운 레퍼토리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초창기에는 하우스 콘서트를 연습 무대쯤으로 생각했다가 공연을 거절하는 연주자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하우스 콘서트만을 위한 공연을 준비해 온다.

그간 하우스 콘서트에 초청된 연주자 1200명 중에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외르크 데무스도 있었다. 몇 해 전 데무스가 일본 공연에 앞서 방한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스태프들이 그를 하우스 콘서트에 초청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그가 평소 받는 연주료는 우리가 줄 수 있는 액수보다 최소 50배는 많았다. 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하우스 콘서트를 이끌어가는 우리 스태프들은 백방으로 뛰며 이리저리 줄을 댄 끝에 결국 그 공연을 성사시켰다. 데무스의 공연 날, 클래식음악 동호회를 비롯하여 발 디딜 곳 없을 만큼 많은 관객이 꽉 들어찼다. 그런 분위기가 불편했을 법도 하지만, 이 거장(巨匠)은 연주가 끝난 후 소년처럼 흥분했다. "이토록 젊고 집중력이 강한 관객들 앞에서 오늘처럼 행복한 연주를 해보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다음에도 한국에 올 기회가 있다면 꼭 다시 한 번 이 무대에 서고 싶다." 거장의 넓은 아량, 청중과 공감하는 능력에 정말 고개가 숙여졌다.

하우스 콘서트를 이끌어가는 스태프들은 모두 다른 직업을 갖고 있거나 학교를 다니면서 무보수로 일한다. 순수한 열정 하나만으로 일하는 그들을, 내 딴에는 자극을 준답시고 매몰차게 몰아세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렇게 시달린 스태프들이 지금은 주요 공연장이나 공연기획단체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나에게 하우스 콘서트가 소중한 것은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 작은 공간을 채워 온 음악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 안에서 나와 스쳤던 수많은 사람, 그게 바로 나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고 성과라는 생각이 든다. 하우스 콘서트 10년은 관객과 연주자, 스태프들이 함께 만들어온 작품이다. 그리고 그 작품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