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
  • 등록일2007.06.17
  • 작성자권유정
  • 조회7313
한 때 영화라는 영화는 개봉관에서 봐야만 하는 시기가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누군가 “너 그 영화 알아?” 라고 물었는데
왠지 “아니”라고 대답을 하는게 부끄러워서였는데
사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거니와,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천성이 게으른 나에게 영화를 보러 극장까지 간다는거 자체가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될 즈음,
각종 영화 채널들이 정신없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으른 시청자가 되어서
늦은 밤 침대를 뒹굴며 보는 TV에는 각별한 즐거움이 있다
주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점.
재미있으면 go, 졸리면 stop을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더 이상 누구와도 사회적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는 점.
하다못해 어딘가에서 빌려온 DVD는 반납의 부담과
기한내에 봐야 한다는 책임감을 동반하지만
친절하고 상냥한 TV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얼마전엔 이 친절하고 상냥한 TV를 보다가
그야말로 엉엉 울고 말았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그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수 년전 스크린을 통해 봤던 작품.
그렇다면 도대체 이 수상한 슬픔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비밀은 아무래도 방심에 있었던거 같다.
영화관에 갈 때면 늘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하곤 한다.
흥! 쉽게는 감동 당하지 않을테다.
그러나 오밤중에 TV를 볼 때는
아무런 다짐도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당하고 마는 것이다.

지난 금요일도 그랬다.
이제 연주가 끝났겠거니… 박수를 치면서 마음이 풀어지는데
쇼팽의 녹턴 2번이 시작됐다.
쇼팽을 바이올린으로 듣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한 번 풀어진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연주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기 마련이다.

생활에 있어서 방심은 늘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거나 뒤통수를 맞거나…
그러나 삶에 있어서의 방심은
가끔이지만 선물로 되돌아 오기도 한다.
그 날의 쇼팽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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