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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인상주의-표현주의로의 길을 열다-고흐

심금숙 | 2007-10-04 15:10:31


언젠가 함께 수업하던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화가하면 생각나는 이름이 무엇인지요.

모른다에서 너무 많아서 한 사람을 댈 수 없다는 아이까지

다양한 대답이 나왔는데요

그 중에서 가장 자주 거론된 이름은 피카소,고흐

모네,밀레,레오나르도 다 빈치,그리고 김홍도를 든

아이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미술이 주로 서양 미술에 편중되어 있구나와

아이들에게 조금 더 다양한 그림을 보여줄 기회가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누구나 알지만 사실은 잘 안다고 할 수 없는 화가중의 한 명이

바로 고흐이지요.

고흐는 네덜란드에 있을 때만 해도 감자먹은 사람들이란

그림으로 뇌리에 확 박히는 상당히 우울한 화면을 선보였습니다.

우울하다는 것은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고

그 곳에서 힘들게 노동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지요.


"Art is jealous, she doesn"t like taking second place an indisposition. Hence I shall humor her. ?What I want and have as my aim is infernally difficult to achieve, and yet I don"t think I am raising my sights to high. I want to do drawings that touch some people."
- letter to his brother Theo, 21 July 1882

그의 그림을 보려고 검색을 하니 이런 글이 나오네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글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논리적인 이성으로 무장을 하고 보아야 하는 그림과

감정을 열어놓고 보아야 하는 그림으로 구분을 한다면

역시 고흐의 그림은 후자에 해당하겠지요?




고흐의 신발과 마그리뜨의 신발은 얼마나 다른가

그래서 더 재미있는 그림보기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제 시험공부를 하던 고등학생 녀석이 자꾸 질문을 합니다.

국사책을 갖고 와서 광작,소작,육의전,시전

면세지 이런 말들의 뜻풀이가 잘 되지 않으니

국사책 읽기가 힘이 든다고요.

그래서 설명을 해주다가  국사책을 암기 과목이라고 생각하니

지루한 것이야,네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떤 신분으로

살았을 것 같니?

그 신분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 시대를 생각해봐

그러자 그것 참 신선한 생각이란 듯이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조선후기의 이야기,그러고 보니 인상주의 혹은

신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자들이 활동하던 시기도

19세기 후반이네요.

오늘 아침에 공부한 목요일 수업의 이야기도 조선 후기와

프랑스 혁명에 관한 관련성과 차이에 관한 것이고

월요일 역사모임에서 읽는 것도 조선후기에 관한 것이라

이상하게 요즘 읽는 글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구나

무엇을 하다보면 이렇게 만나는 지점이 생기네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석탄을 나르는 여성 광부들의 신발을 보여주고 있는

이 그림에서 한 짝을 뒤집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네요.

광부의 삶을 한 편의 소설로 형상화하는 것만큼이나

마음속을 울리는 서사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라고

할까요?



프랑스로 건너오기 전의 그림중에서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림이 바로 감자먹는 사람들이지요.

동생 테오가 프랑스에서 화상으로 일하면서

형을 불러들입니다.

프랑스로 오게 된 고흐는 인상주의자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의 그림세계는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되지요.

겨우 십년 동안 작업을 하였지만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악조건을 견디면서 그림을 그린 화가



파리를 그린 그림의 연도를 보니 1886년부터 연도가

표기되어 나오는군요.

당시 파리는 재개발 사업이 한창이어서

오스만 남작이 파리 시장이었을 때 나폴레옹 3세로부터

지시를 받고 재개발에 들어갔다고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파리는 그러니까 오래전부터의

파리가 아니라 19세기 말에 재개발된 파리라고 할 수 있지요.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쭉 뻗은 도로는

사실은 시위 진압을 쉽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도심지를 살아나게 했고

가스등이 죽 늘어선 파리시내는 밤에도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는 환락의 도시가 되었다고요

도시 외곽에 생긴 물랑루즈를 비롯한 카바레에

노동자뿐만 아니라 귀족들까지 몰려들어

춤과 노래가 왁자한 밤문화를 즐겼다고 하네요.

그런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화가중에 한 명이
"
로트렉이고 우리들은 그의 그림을 통해서

한 시대의 문화속으로 들어가보는 체험을 하기도 하지요.



당시에 그려진 고흐의 자화상인데요

붓터치를 보고 있으면 갑자기 조용하던 우리들의 마음도

흔들리는 기분이 들지 않나요?

그의 표정,그를 둘러싼 화폭의 색에 이끌려서.



초창기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이것이 같은 화가의

그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변화된 모습으로

원색을 과감하게 쓰는 고흐의 변화를 볼 수 있네요.




평소에는 글을 쓰고 그림을 볼 때 컴퓨터 안에 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문제는 음악을 자꾸 바꾸어서 클릭해야 한다는 것이라

흐름이 끊어져 성가셨는데

오늘 머리를 써서 마루의 전축에 음반을 걸고

문을 열고 듣고 있으니 아,어째서 그 전에는 이런 생각을

못했나,어이가 없군요.

고정관념이란 참 무섭구나,이렇게 조금만 바꾸어도

훨씬 좋은 환경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데 하고

어이없어 하고 있는 중입니다.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가 여러 점 있지요.

워낙은 화병에 꽃혀있는 해바라기 그림이 잘 알려져

있지만 제겐 이 그림이 더 인상적이라 가끔 보게 됩니다.




밤의 몽마르뜨르와 낮의 몽마르뜨르는 사뭇 다르네요.



아를에 있을 때의 그림입니다.

그가 그 곳에서 고갱을 기다리면서 방을 정리하고

그림속에서 고갱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는

아주 여러번 이런 저런 책에서 언급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에피소드가 되었지요.

사실 고흐는 정신병이 있었다기보다는 간질 환자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간질발작이 오면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웠지만

보통의 경우는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고요.




테오와의 잦은 편지왕래로 아마 이 우체부 아저씨를

자주 만나게 되었겠지요?



고흐의 색을 보고 있자니 왜 그가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이야기되는가에 수긍이 갑니다.




위는 고흐의 의자,아래는 고갱의 의자란 제목의 그림입니다.

두 그림을 통해서 둘의 차이가 느껴지네요.




지금까지의 그림에 비해서 그의 그림의 특성이 확

살아있는 그런 그림이지요?




정신의 불안정을 느껴서 입원한 후에도 고흐는

수없이 많은 그림들을 그리지요.




모네의 아이리스,고흐의 아이리스

두 그림은 두 사람의 차이를 보여주어서 가끔

한꺼번에 찾아서 비교하면서 보기도 하지요.




병원에서 나온 이후 그는 프랑스 북부쪽의 오브르라는

곳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셈인데요



이 그림에서의 까마귀는 불길한 느낌으로

그의 최후를 보여주는 것같아서 잘 보게 되지 않는

그림입니다.

살아생전에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늘 동생에게 아쉬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그런 삶을

살았지만 그의 그림은 살아남아서

계속 우리들의 삶과 함께 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가끔 아이들이 물어봅니다.

아무리 유명해졌다고 해도 살아생전에 그렇게

배고프고 무명인사로 사는 것이 과연 고흐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요.

후세에 덜 유명하더라도 살아있을 때 조금 더 잘 사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닌가하고요.

한마디로 무자르듯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요

물론.

살아갈수록 질문에 답하는 것이 점점 어렵게 느껴지는 것

그래도 질문자체를 멈추지 말아야 하고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우리들의 인생은 자꾸 앞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문득 고흐의 그림을 보다가 생각이 엉뚱하게 번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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